생활과 수행, 둘 사이의 징검다리 찾아나선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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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20일 지리산 승가 야단법석에서 33명의 수행자가 모여 깨달음에 대한 난상토론을 열었다. 불교계에선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절집에는 “살림살이를 내보인다”는 말이 있다. 자신의 수행 정도를 밖으로 드러낸다는 뜻이다. 그런데 한국불교계에는 묘한 불문율이 있다. 일명 ‘묻지마, 살림살이’다. 남의 살림살이도 묻지 말고, 자신의 살림살이도 내보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뿌리 깊은 이유가 있다. “과연 누가 깨달음에 대해 말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구심과 선지식의 부재에 대한 짙은 절망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20일 경남 함양군 지리산 자락 금선사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펼쳐졌다. 도법(61·실상사 선덕) 스님이 주도하는 ‘움직이는 선원’에서 동안거 중에 야단법석을 열었다. 지리산을 걸으며 ‘움직이는 동안거’를 하던 수행자들이 강당에 모였다. 33명의 스님들은 ‘깨달음’이란 주제로 ‘나의 살림살이’도 내놓고, ‘남의 살림살이’도 들었다. 불교계에선 꽤 ‘보기 드문 풍경’이었다.

먼저 혜진 스님(실상사 화림원 연구위원)이 말문을 열었다. “생활이 수행이 되고, 수행이 생활이 돼야 한다. 그것이 전인적 수행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는 풍토에 대해 굉장한 갑갑함을 느끼기도 했다.” 도법 스님이 말을 받았다. “수행이 따로 있고, 삶이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전도몽상(顚倒夢想)이다. 그게 둘로 분리되면 갈등과 고통을 벗어날 수가 없다.”

도법 스님은 그 말끝에 질문도 하나 던졌다. “개념적으로 얘기하지 말자. 일상 속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깨달음의 행이 중도행이다. 가령 배고픈 사람에게 밥 한 그릇을 보시한다고 하자. 그럼 밥 한 그릇을 어떻게 보시할 때 중도행이 되고, 어떻게 보시할 때 전도몽상행이 되겠는가?”

좌중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실상사 화엄학림의 한 스님이 답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줄 때도 ‘너를 위해 베풀어준다’는 우월감이 내 안에 있더라. 그런데 그건 중도행이 아니더라. 매 순간 ‘내가 했다’는 상(相)이 남지 않게 노력하는 것 자체가 바로 수행이더라.”

야단법석은 수행과 생활, 둘 사이의 징검다리를 끊임없이 모색했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보라. 거기에는 연민의 마음이 큰 단초로 자리 잡고 있지 않나?” “맞다. 한국불교는 ‘연민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아주 세세하게 짚어가야 한다. 그러나 ‘화두만 잘 들면 된다’는 식으로 거칠게 다루는 측면이 강하다.”

토론이 관념적으로 흐를라치면 어김없이 반박이 나왔다. “야단법석을 하고 있는 우리 자신을 보자. 방금 점심을 먹고, 덥고, 졸리기도 하다. 이게 우리의 실상이다. 깨달음은 삶의 문제를 푸는 것이다. 그럼 지금 여기서 어떻게 하는 것이 문제를 푸는 중도행인가?” 잠시 후에 도법 스님이 일어나더니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딱 떨어지는 대안은 없었다. ‘철커덕!’하고 단박에 문제를 푸는 열쇠도 없었다. 그러나 ‘야단법석’에는 불교계 내부를 향한 강한 문제의식과 대안을 찾고자 하는 강한 목마름이 있었다. 수행자의 살림살이를 주저 없이 터놓고 주고받는 야단법석, 그건 건강한 모색이었다.  

함양 글·사진=백성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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