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고 신호일 중산고 이사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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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지난 20일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신호일(申虎日) 중산(中山)고 이사장은 배우지 못한 한을 풀기 위해 말년을 육영사업에 바쳤다.

"비록 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없었지만 제2의 신호일 같은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무조건 부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변화가 생겼다. " (고인의 회고록 중에서)

함경남도 북청군 중산간이학교 2년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는 1946년 월남한 뒤 청계천 등지에서 옷감사업을 하며 큰 돈을 벌었다.

이후 70년대 말 을지로 빌딩을 선경그룹에 매각하면서 받은 1백억원 등 사재 2백여억원을 털어 89년 학교법인 중산학원을 설립한 뒤 94년 중산고(전 수서고)의 문을 열었다.

빈소를 찾은 고향 친구 동규모(董奎模) 씨는 "양말을 기워 신고 다니면서도 학교에 투자하는 돈은 아낀 적이 없었다" 고 회고했다.

임종 3개월전에는 "내가 세상을 떠나도 학교는 건전하게 운영돼야 한다" 며 신내동에 있는 4천3백여평의 과수원을 학교에 기탁하기도 했다.

학생과 교사에게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주말에만 학교를 둘러봤던 그는 손수 나무를 손질했으며 학교 뒷편 공원부지에도 전국을 다니면서 직접 골라온 수목을 가져다 심었다.

2대 중산고 교장을 지낸 장병환(張炳煥)씨는 "정직.검소하고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분" 으로 그를 기억했다.

"교장으로 부임하던 첫날 '학교를 돕겠지만 간섭은 하지 않겠다' 고 말씀하셨죠. 4년동안 그 약속 그대로 실천하셨습니다. "

"청렴결백의 시금석과도 같다" 라는 주변의 평처럼 그의 강직함은 교원 임용 때 확연히 드러났다.

2년동안 여기저기서 빗발치는 청탁에도 눈하나 깜짝하지 않자 3년째 되던 해에는 단 하나의 청탁도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 가장 친한 친구가 사위의 임용을 부탁했으나 묵묵무답이었고, 사촌동생의 딸은 부탁했다는 이유로 감점을 당해 임용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엄부(嚴父)' 라는 말로 고인을 회고한 큰아들 영철(申英哲.51)씨는 "아버님께서는 당신이 가진 재산을 자식들에게 주지 않겠다고 입버릇처럼 강조하셨다" 며 "판교 근처에서 농장을 운영할 때에는 인부를 사지 않고 직접 정원수를 재배할 정도로 검소하고 스스로에게 엄격하셨다" 고 말했다.

간암으로 고통받던 그는 자신의 회고록의 마지막 장을 이렇게 쓰고 있다.

"아직, 아직은 아니다. 병마와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산 증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결코 나약해질 수 없다. 나약한 정신을 버린다면 그 어떤 병마와 싸운다 해도 지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겠다. 그리고 내가 세운 학교에서 젊은 학생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조금은 더 지켜보고 싶다. "

그러나 더이상 손수 심은 아름드리 나무가 가득한 교정을 그는 둘러볼 수 없게 됐다. 하지만 그가 뿌리고 간 배움의 씨앗은 그가 키운 나무만큼이나 크게 자라날 것이다.

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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