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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아관파천 때 맛들여 … 매일 한 대접 ‘원샷’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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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커피를 즐긴 고종 황제. 중앙포토


‘싸구려 커피를 마신다. 미지근해 적잖이 속이 쓰려 온다. 눅눅한 비닐 장판에 발바닥이 쩍 달라붙었다 떨어진다’(2008년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의 ‘싸구려 커피’).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그대 올 때를 기다려 봐도 웬일인지 오지를 않네. 내 속을 태우는구려’(1968년 펄 시스터스의 ‘커피 한잔’).

두 노래는 발표 시기가 40년이나 차이 난다. 40년이 흘렀어도 커피 향은 여전히 대중의 가슴을 부여잡고 있다.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젊은이에게도, 싸구려 자취방에서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내는 20대에게도 커피는 ‘필수품’이 된 것이다.

한국에서 커피의 역사는 110년 남짓 됐다. 첫 등장은 암울한 조선 말기 시대 상황과 연계돼 있다. 명성황후가 일본인에 의해 무참히 살해된 을미사변(乙未事變ㆍ1895년) 이후 조선 정세는 흉흉했다. 고종 황제는 1896년 신변의 불안을 느낀 나머지 황태자와 함께 경복궁을 빠져나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고종은 그곳에 1년 동안 머물렀다. 잘 알려진 아관파천(俄館播遷)이다. 나라가 백척간두였던 시절, 고종은 러시아 측이 제공한 커피를 마시면서 두려움과 시름을 달랬다고 한다. 고종은 커피의 쓴맛과 검은 색깔 때문에 이를 보약으로 생각했다는 말도 있다. 매일 대접에 담아 한 번에 들이켰다는 것이다. 반면 고종이 커피 향을 음미하고 마셨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든 임금이 커피를 즐기면서 한반도에 커피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커피는 고종과 황태자(순종)에게 큰 상처를 주기도 했다. 바로 김홍륙의 독다(毒茶) 사건(1898년)이 그것이다. 당시 고종의 러시아어 통역 담당이었던 김홍륙은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고 권력을 휘둘렀다. 고종이 거액을 착복한 김홍륙을 유배 보내려 하자 그는 앙심을 품고 1898년 고종의 생일 만찬에서 고종과 황태자가 마실 커피에 독약을 탔다. 황현의 『매천야록(梅泉野錄)』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김홍륙은 원한을 품고 어전에서 음식을 담당하던 김종화를 매수해 고종이 마시는 커피에 독약을 타도록 꼬드겼다. 평소 커피를 즐겨 마셨던 고종은 한 번 마시고 토해 냈지만, 맛을 구분하지 못하던 황태자는 맛을 보다가 복통과 어지럼증으로 쓰러졌다.”
이 사건으로 나중에 ‘조선 최후의 왕’이 된 순종의 몸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소설가 김탁환은 이를 소재로 『노서아 가비(露西亞加比ㆍ러시아 커피의 음역)』를 지난해 출간하기도 했다.

왕실에서 시작된 커피 문화는 곧 고관대작에게 퍼졌다. 이후 1920~30년대 커피는 신문화의 상징이 됐다. 문인이 다방에 모여 인생과 문학을 논할 때 빠지지 않았다. 신세대 젊은이에게 다방이 만남의 장소로 떠오른 것도 커피 덕이다. 1927년 서울 종로에 문을 연 다방 ‘캬캬듀’는 당시 해외 유학파의 아지트였다. 구두와 양장을 한 신세대 젊은이는 이곳에 모여 사랑과 인생을 얘기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커피는 일부 상류층의 사치품이었다. 커피가 대중 속으로 파고들기까지는 그 후 서너 번의 도약기를 거쳐야 했다.광복 이후 주한 미군이 커피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미군의 군용 식량에 들어 있던 봉지 커피가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면서 서민들의 입맛을 바꿔 놓은 것이다. 당시 미군의 봉지 커피는 암시장에서 최고 인기 상품이었다.

60~70년대는 다방 문화가 커피의 중흥을 이끌었다. 이때 등장한 ‘모닝커피(커피에 날계란 노른자를 넣고 참기름을 살짝 첨가해 마시는 커피)’는 지금 50~60대에는 추억이기도 하다. 이때까지만 해도 커피는 맛보다는 폼과 멋으로 먹는 기호품이었다.76년 커피믹스가 등장하면서 커피 시장의 판도도 바뀌었다. 설탕ㆍ프림ㆍ커피를 섞은 커피믹스는 ‘다방 커피’를 밀어냈다. 78년에는 커피 자동판매기가 첫선을 보이면서 누구든지 쉽게 커피를 접할 수 있게 됐다.

90년대 이후에는 원두커피가 인기몰이를 했다. 99년 이화여대 앞에 개점한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1호점은 커피문화를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스타벅스ㆍ커피빈 등 외국계 커피전문점 브랜드가 한국 시장을 주도했다. ‘커피의 맛보다 브랜드를 마신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최근에는 질을 강조하는 토종 커피 브랜드가 잇따라 등장하며 외국계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1조9000억원(2009년 말 기준)에 달하는 국내 커피 시장에서 커피전문점은 28.9%(5500억원)를 차지하고 있다.

김창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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