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유가 정책이 세계경제 위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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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성장을 위해 지급해온 에너지 보조금이 고유가 시대를 맞아 아시아 각국의 나라 살림을 더 어렵게 하는 주범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코노미스트와 아시안월스트리트저널(AWSJ)은 최근 아시아 국가들이 낮은 기름값을 유지하기 위해 지급하는 석유 보조금 지출액이 고유가로 크게 늘어나면서 각국의 재정을 압박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말레이시아는 지속적인 재정적자에 시달리면서도 올 들어 9월까지 에너지 보조금으로 35억달러를 지출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18%(19억달러) 늘어난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석유 보조금 규모가 올해 60억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세계에서 인구가 넷째로 많은 인도네시아가 건강과 교육부문에 쓰는 돈보다 많은 것이다.

태국도 올해 보조금 규모가 10억달러에 달해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포함한 지출 계획을 수정해야 할 상황이다. 인도도 예외가 아니어서 올해 등유와 액화석유가스(LPG)에 대한 보조금으로 14억달러를 지출했다. 각종 유류세 면제액도 5억4000만달러에 달했다. 골드먼삭스의 아담 르 메슈리 이코노미스트는 "이들 국가에선 에너지 보조금 때문에 배럴당 40~50달러의 고유가 상황을 느끼지 못했다"고 말했다.

AWSJ는 보조금이 세계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꼬집었다. 아시아 각국의 원유 수요 증가가 고유가를 부르는 상황에서 보조금이야말로 에너지 과소비를 부추기는 주범이고, 이는 유가 상승의 악순환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경우 엔진을 켜놓은 채 승객을 기다리는 버스들을 흔히 볼 수 있다. 한 투자자문회사의 매니저인 탄 텡부는 "디젤유가 거의 공짜나 다름없다"며 "누구도 연료를 아껴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아시아 나라들이 다른 예산을 줄여가며 보조금을 지급하다 보면 여러 부작용이 나타날 것이라고 지적했다.대표적인 원유수출국이었던 인도네시아는 석유제품 값을 국제수준의 60%로 유지하느라 정작 필요한 유전 개발 투자를 소홀히 해 올 들어 처음 원유수입국으로 전락했다.

보조금 지급은 또 저소득층에 돌아가야 할 복지예산을 승용차를 소유한 중산층이 차지하는 결과를 낳아 되레 빈부 차이를 키운다는 지적이다.

정유업체들의 불만도 커지고 있다. 정부가 시중 석유제품 값을 억누르다 보니 정유업체로서는 적절한 이윤을 챙길 수 없기 때문이다. 씨티그룹 이코노미스트 앤턴 구나완은 "정부는 연료 보조금 규모를 줄이거나 아예 없앨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허귀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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