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윤숙씨 15번째 시집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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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시인 홍윤숙(79.사진)씨가 열다섯번째 시집 '지상의 그 집'(시와시학사)을 최근 펴냈다.

홍씨는 시집 첫머리 '자서(自序)'에서 "나아갈 때와 들어갈 때를 분명히 하자고 다짐하면서 고별사를 쓰듯이 책을 묶는다"고 밝혔다. 소생할 기미 없이 죽어가는 나무 같은 자신의 시가 되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애면글면 힘쏟는 일에 많이 지쳤다는 것이다. 홍씨는 시로 인해 고통스러우면서도 행복했고, 적막하면서도 충만했던 자신의 시력(詩歷) 57년을 서시 '위난(危難)한 시대의 시인의 변(辨)'에서 정리하기도 했다. 홍씨는 1948년 등단했다.

시집에는 역시 나이듦과 깨달음에 관한 시편들이 두드러진다. '그 집 3'에는 깊고 평안한 잠을 풀어내는 '바륨 한 알'이 나오고, '신화 또는 전설'에서는 질병의 종합백화점 같은 노화의 각종 증상들이 얘기된다. '그 집 2'에서 시인은 예전엔 "언제나 눈뜨면 낯선 땅 낯선 하늘이길 갈망했었"지만 이제는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노래한다. 또 지내놓고 보니 비어 있는 나의 내부, 내 집의 숨은 주인은 따로 있었고 나는 목숨을 담보로 그 집에 세든 세입자였을 뿐이다('그 집 3').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집을 출간한 소감을 묻자 홍씨는 "언어를 추적하는 집중력은 점점 떨어지고 변화는 쉽게 찾아지지 않는, 그래서 시 쓰기를 그만두고 싶은" 심정을 얘기했다. 또 "지난 57년이 결국은 나만이 쓸 수 있는 한 구절, 시 한 편을 찾아 헤맨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이번 시집의 '서시'가 말하자면 그런 시다.

'귀로 10'의 "물 위에 이름 석 자 쓰고 쓰다가"라는 구절은 홍씨에게 큰 기쁨과 함께 말로 할 수 없는 허탈함을 동시에 안겼었다. 인생이 결국 물 위에 이름 쓰는 일처럼 허망한 것이라는 깨달음을 표현한 구절을 얻은 기쁨도 잠시, 홍씨는 200년 전 영국시인 존 키츠가 이미 쓴 구절이라는 사실을 발견한다. 홍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깨달아 얻은 내 말이라는 생각에 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홍씨의 속은 아직도 시로 들끓고, 이제 시는 가끔 찾아온다. 홍씨는 "최근 시 쓰기를 잠시 접었었다. 요즘은 한 달에 한 편 정도 쓰고 있다"고 말했다.

신준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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