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상처속의 사람들] 上. 북송 비전향 장기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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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조용히 떠나게 해줘요. 여론조사가 부정적으로 나와 송환에 차질이 생기면 책임질 거요?"

폐암말기를 앓는 아내 때문에 북송을 포기한 비전향장기수 權낙기(54)씨는 수형생활과 심경 등에 대해 묻자 거세게 반발했다.

그는 "우린 아직도 남한에서 죄인처럼 살고 있다" 며 "수십년간 설움을 당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내면을 보여달라고 하면 상처를 덧나게 할 뿐" 이라며 내버려둘 것을 요구했다.

9월 2일 비전향장기수 63명의 북한 송환을 앞두고 우리 사회에서는 두가지 대립적인 시각이 팽팽히 맞서 있다.

장기수는 남파 간첩 또는 빨치산 출신이다. 이에 따라 북한체제를 옹호하는 '좌익 골수' 인사여서 죄질이 아주 나쁜 체제 파괴 범죄자라는 시각이 많다.

반면 재야단체 등에선 인권 차원에서 문제가 있을 수 있는 장기 수형 생활 등에도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양심수' 라는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 장기수의 삶=이들은 골수 좌익을 자처하며 남한 당국의 계속된 설득에도 전향을 거부한 남한 내에서 골치아픈 존재였다.

그 결과 오랜 수형생활과 병마, 심리적 장애에 시달렸다. 출소 후에는 생활고와 보안관찰법에 따른 당국의 '관찰' ,가족들의 고통에 대한 죄책감이 그들을 악령처럼 따라다녔다.

43년10개월 수감으로 국제사면위원회가 세계 최장기수로 선정한 김선명(金善明.75)씨는 북한에 찾아갈 고향과 가족도 없지만 북한으로 가기로 했다.

그는 6.25 때 북한군에 입대한 뒤 1951년 강원도 철원에서 포로가 돼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95년 8월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金씨는 출소 후에야 아버지와 누이들이 사망한 사실을 알았다. 동생들도 만나길 거부했다. 허약해진 몸으로 치과기공소에서 배달을 하며 생계를 꾸려왔다.

金씨는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은 변함이 없어 북한으로 가기로 했다" 고 말했다. 장기수들은 여전히 "북한은 지상천국" "납북자는 없다" 는 식으로 북한을 맹목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존재다.

◇ 두가지 시각〓동국대 강정구(姜禎求)교수는 "장기수들도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북한을 압박하면 남북관계가 나빠질 수 있다" 고 강조했다.

경실련 통일협회 차승렬 부장은 "장기수들도 냉전시대의 피해자" 라고 했다.

반면 오제도(吳制道)변호사는 "장기수 송환으로 간첩행위는 죄가 되지 않는다는 인식이 국민에게 확산될까 두렵다" 고 말했다.

또 재향군인회 이선홍(李善洪)대변인은 "인도적 차원의 송환을 반대하진 않지만 장기수들이 체제전복 세력이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며 "이들을 영웅시하거나 미화해서는 절대 안된다" 고 강조했다.

하재식.박현영.정효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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