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대기자의 투데이] 북한-일본 협상에 거는 기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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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정상화하기까지는 1951년의 예비회담 시작에서 65년 한.일기본조약 체결까지 14년이 걸렸다.

1991년 시작됐다가 이듬해 결렬된 이후 8년 만에 지난 22일 재개된 북한과 일본의 수교협상은 앞으로 어떤 험난한 길을 걸을 것인가.

북.일수교는 북.미수교와 함께 한반도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해서는 비켜갈 수 없는 조건의 하나다.

50년대와 60년대의 한.일협상과 오늘의 북.일협상에는 그 결과를 좌우할 정도의 닮은 점과 다른 점이 있다.

닮은 점은 그때의 박정희(朴正熙)정권의 경우가 그랬던 것같이 지금의 김정일(金正日)정권도 북한의 경제를 살리는 계획에 일본으로부터 받을 배상(賠償)을 재원(財源)의 큰몫으로 계산하고 있고, 따라서 겉으로 보이는 표정과는 달리 '잿밥' 을 위해 조기타결을 갈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1965년 한국의 국민총생산은 30억달러였고 98년도 북한의 그것은 1백26억달러다. 물가지수의 상승을 감안하면 숫자상으로는 그때의 한국과 오늘의 북한의 경제사정이 비슷하다.

한국은 김종필(金鍾泌)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大平正芳) 일본 외상 간의 62년 밀약에 따라 3억달러 상당의 물자 및 서비스와 2억달러의 차관(借款)을 받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그때의 5억달러를 물가지수 상승을 기준으로 계산하면 오늘의 22억7천만달러에 해당한다.

36년 간의 '노예생활' 에 대한 대가로는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액수다. 지금 북한은 50억달러에서 1백억달러의 배상을 기대하고 일본은 배상액수에 관해 굳게 입을 다물고 있다.

한.일협상과 북.일협상의 가장 다른 점은 한국과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간섭과 압력의 있고 없고다.

일본의 아사히(朝日)신문은 최근 한.일수교협상에 미국이 깊이 개입했다는 미국 정부의 공식기록들을 보도했다.

아사히가 입수한 기록을 보면 한.일수교협상은 한.미.일 3각협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정도로 미국의 압력에 크게 좌우됐다.

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그 당시 미국은 베트남에서 전쟁을 확대하고 있었다. 한국은 베트남에 군대를 보내고 일본은 미국의 후방기지 역할을 할 때였다.

미국에는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두개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이 과거를 청산하고 관계를 정상화하는 것이 절실했다. 그래서 미국은 영향력을 적극 행사했다.

한.일협상의 핵심쟁점이던 배상문제에서 한국은 8억달러를 요구하고 일본은 5천만달러를 제시했다. 그 걸 중재한 것이 미국이다.

62년 애버럴 해리먼 극동담당 국무차관보는 도쿄(東京)에서 이케다(池田勇人)총리에게 한국이 요구한 액수의 절반을 수락하라고 종용했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유엔에서 오히라 외상에게 무상을 3억달러로 올리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 대신 朴대통령은 일본이 거부하는 청구권이라는 명칭 대신 재산청구권의 해결과 경제협력이라는 표현을 받아들였다.

과거문제에서도 사죄에 반대하던 일본을 설득한 것은 라이샤워 미국 대사였다. 그는 64년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郞)외상을 만나 과거에 대한 사죄로 일본의 큰 도량(度量)을 보여주라고 타일렀다.

결국 시나의 65년 서울 방문과 과거에 대한 "깊은 반성" 이 성사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일기본조약과 4개의 협정이 체결됐다.

북한은 외부지원없이 주체적으로 일본과 협상하고 있다. 북.일수교협상을 보는 우리의 입장은 두 갈래다.

한반도문제 해결의 중요한 고리의 하나로 북.일관계의 조속한 정상화를 바라면서도, 제발 북한만은 35년 전 한.일 졸속수교를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아 사죄와 배상에서 후회없는 협상을 할 것을 기대한다.

최악의 경제사정 아래서도 북한은 북.일협상에서 주권국가의 명예와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말한 金위원장의 결의(決意)에 기대를 거는 것도 그런 심정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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