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 안 낳는 사회] 10. 시늉뿐인 출산 지원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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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산 휴가.육아휴직제도 등이 개선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큰 가운데 한 여성 직장인이 임신한 몸으로 힘겹게 출근하고 있다. 변선구 기자

"할인점에서 일했는데 권고사직을 당했습니다. 임신부라 고객들 눈에 거슬린다고 지점장이 강요했어요."

"우리 회사는 출산 휴가를 40~50일밖에 못 갑니다. 법대로 90일을 쓰겠다고 하면 당장 그만두라고 해요."

요즘 여성단체 상담실에는 출산휴가로 고민하는 전화 상담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가 운영하는 '평등의 전화'의 경우 모성보호 상담이 2001년 236건이었으나 지난해엔 494건으로 늘었다. 상담 가운데 67%는 ▶임신.출산에 따른 해고나 강제 퇴직▶법정 수준 이하 출산 휴가 등의 호소다. 협의회 관계자는 "법으로는 90일 출산휴가를 보장하지만 현실은 딴판"이라며 "일하는 여성의 육아를 돕자고 만든 법이 오히려 이들을 직장에서 내몰고 있다"고 했다.

애 낳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비현실적인 출산지원 제도를 확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다.

◆ 기업들은 '출산휴가 부담' 주장=정부는 2001년부터 출산휴가 기간을 60일에서 90일로 30일 늘렸다. 그런데 30일치 급여만 고용보험에서 지급하고 있다. 기업은 여전히 60일간의 급여를 부담해야 한다. 기업 입장에선 출산휴가 기간이 더 늘어 그만큼 대체 인력 등의 비용이 증가했다고 주장한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여성인력 고용확대 방안'보고서에서 이 같은 어려움을 지적하고 개선책을 요구했다.

최근 여성 실업자가 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기업에서 임신 등으로 퇴직할 수밖에 없는 여성 근로자가 적지 않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여성 실업자는 10만명이 늘었다. 증가율로 보면 남성의 두배 수준이다.

한국여성단체연합 박차옥경 노동복지부장은 "기업들이 구조조정 과정에서 관행적으로 여성을 우선 해고하는 데다 최근에는 불합리한 출산휴가 제도 확대에 따라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를 낳게 하려면 그 비용을 사회 전체가 책임져야 한다"며 "출산휴가(90일간) 급여를 모두 정부 재정이나 고용보험에서 지원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도 "전체적으로 출산휴가 비용을 따지면 연간 1500억원 수준"이라며 "고용 효과가 있기 때문에 고용보험에서 부담하는 것도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다른 목소리도 있다. 실업자 지원이라는 고용보험 취지에 어긋난다는 얘기다.

배일도(국회 환경노동위 간사) 한나라당 의원은 "우선 기업의 부담을 최소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며 "장기적으로 스웨덴처럼 모성 보호를 위한 별도의 사회보험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업의 인식변화 필요성도 지적됐다. 황현숙 서울여성노동자회 평등의 전화 부회장은 "기업이 여성 근로자의 임신.출산을 무조건 비용 증가로 여겨 기피하는 뿌리깊은 인식부터 바꿔야 할 때"라고 말했다.

◆ 다양한 제도 도입이 시급=전문가들은 남성이 육아에 동참할 수 있는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서문희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부연구위원은 "출산휴가를 남성까지 쓸 수 있게 해야 애를 낳고 키우는 것이 남녀 공동의 책임이라는 인식이 확산될 것"이라며 "육아 휴직도 일정 기간을 반드시 남성 근로자가 써야 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나절 근무 등 탄력적인 '시간제 육아휴직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대신 월급을 적게 주는 방식이다. 지난해 한국노동연구원 조사에 따르면 육아 휴직을 사용하지 않은 여성 근로자 중 절반(45%)이 '시간제 휴직제도'가 도입되면 이용할 생각이 있다고 답했다.

여성 근로자의 70%에 이르는 비정규직 보호도 시급하다는 것이다.

계약직 은행원인 최모(29)씨는 "임신 사실이 알려지면 퇴직을 종용받기 때문에 한달이라도 더 다니기 위해 이를 숨기다 유산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현 규정은 고용보험에 180일 이상 계속 가입해야 출산휴가비가 나온다. 따라서 이직이 잦은 비정규직 여성은 혜택을 보기가 쉽지 않다.

손영주 한국여성노동자협의회 사무처장은 "고용보험은 계속 가입 여부를 따지지 말고 최근 1년간 180일만 되면 출산휴가비를 주도록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농촌 여성 지원도 절실하다는 지적이다. 현재 전국 1214개 면 지역 중 41%가 보육 시설이 없다. 농촌 일손이 달리면서 여성 농업인이 할 일은 늘어나는데 마땅히 아이를 맡길 곳이 없는 실정이다.

◆ 특별취재팀=김시래(팀장), 신창운 여론조사전문위원,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신성식.신예리.박혜민.김영훈.김정하.하현옥 기자 <srkim@joongang.co.kr>
사진=변선구 기자 <sunni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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