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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가 추천한 명의] 홍경수 삼성서울병원 정신과 교수 → 이윤성 서울대의대 법의학과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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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도 말을 합니다. 단, 그들은 아무하고 얘기하진 않습니다.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면서 자신들의 주장을 경청할 수 있는 사람하고만 대화합니다.”

부검을 이렇게 설명하는 서울대의대 법의학과 이윤성 교수는 법의학을 ‘억울한 주검, 억울한 피해자의 한을 풀어주는 학문’으로 정의한다.

의사의 천직은 산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다. 그도 처음엔 의사였던 부친의 가업을 잇기 위해 서울대의대에 입학했다. 1971년의 일이다. 하지만 본과 3학년 때 우연히 지인으로부터 억울한 죽음(의문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죽은 자를 위한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서슬 퍼런 독재정권 시절, 민주주의나 인권을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탄압의 대상이 됐고, 어느 날 갑자기 어디론가 끌려갔다가 주검이 돼 가족의 품에 돌아온 의문사의 주인공들. 당시만 해도 사망 원인을 밝히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그들의 죽음은 본인은 물론 가족에게도 응어리진 한을 남겼다.

독재 시절 의문사 지켜보며 결심 굳혀

“인권의 출발점은 억울한 죽음을 밝혀내 재발을 막는 데 있다.” 그때부터 이 교수의 철학은 확고했다. 법의학자가 되고자 결심은 했지만 갈 길은 멀고 험난했다. 일제 시대에도 존재했던 법의학이란 학문이 해방 후 미국식 의학 교육이 도입되면서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1979년부터 5년간 서울대병원에서 병의 원인과 사인을 찾아내는 병리학 전공의와 전임의 과정을 거쳤다.

이 교수가 법의학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86년, 서울대 의대 법의학 교수로 임용된 이후다. 3년 뒤, 일본 쇼와대학에서 국내 최초로 머리카락을 통해 필로폰을 검출하는 기술을 습득한 그는 1990년부터 1년간 미국 볼티모어의 ‘의학 검시국 (Office of the Chief Medical Examiner)’에서 전공의 겸 연구원으로 법의학을 전공했다.

“법의학은 부검을 통해 변사체 등의 사인을 밝힐 뿐 아니라 DNA 검사를 통한 범인 확인, 마약을 비롯한 각종 독극물 검출, 의료사고 감별 등 다양합니다. 날로 지능화하는 범죄에 대응하기 위해선 법의학적 지식을 동원한 과학수사가 필수 요소지요. 실제 법의학자는 학문 연구뿐 아니라 법원·검찰·경찰·보험 등 범죄 사건에 과학적 증거를 제시하는 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강경대 군·최종길 교수 사인 밝혀내

이 교수는 법의학자로서 그간 강경대 군와 최종길 교수 사망처럼 온 국민의 분노를 산 사망 원인을 밝혀냈다. 또 군대에서 의문사한 무명 청년 등 가슴 아픈 주검 앞에 과학적 근거를 제시했다.

“ 정년 퇴임을 앞두고 젊은 여성과 재혼한 노 교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석 달 후 부인이 싸준 도시락을 연구실에서 먹다 노 교수가 급사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부검의 필요성이 당연히 부각됐지요. 하지만 슬픔에 젖어 있던 자녀들은 ‘아버지를 두 번 죽일 수 없다’며 곧바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반 년 뒤, 상속 재산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면서 망자의 재산 대부분이 사망 직전에 젊은 몫으로 바뀐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그제서야 자식들은 부검을 원했는데 이미 때는 늦었지요. 부검은 언제든 할 수 있는 게 아니며, 시기를 놓치면 회복할 방법이 없습니다. 진정 망자를 위한다면 사인을 찾아주는 게 가족의 의무라고 할 수 있어요.”

전문적 훈련받는 검시관 제도 있어야

이 교수는 국내에 아직 전문적인 검시관 제도가 정착되지 못한 사실도 안타깝다고 했다.

“외과수술은 외과의사가 하고 어린아이는 소아과 의사가 진료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변사체 진찰은 의사라면 누구나 검시관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오해가 만연해 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도 이제는 의료선진국답게 법적·제도적 장치도 선진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주검을 진찰하고 원인을 찾는 검시관은 반드시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의사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검과 전문적인 검시관 정착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진혼굿이라는 철학을 가진 이윤성 교수. 그의 눈과 목소리에는 ‘죽은 자의 인권을 지키겠다’는 사명감이 가득 차 있었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홍경수 교수는 이래서 추천했다

피해자뿐 아니라 가족의 한까지 풀어주는 숭고한 역할

“법의학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죽은 자를 위해 의료 행위를 한다는 점입니다. 죽음을 인생의 종착역으로 본다면 죽은 자의 한을 풀어주는 일이야말로 인생의 끝마무리를 제대로 하게끔 도와주는 셈이죠. 인권이 중요시되는 선진국일수록 잘 사는 웰빙(well-being)뿐 아니라 잘 죽는 웰 다잉(well-dying)의 필요성이 강조됩니다.

비단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 가족의 한을 푸는 일도 중요합니다. 상상하기 싫지만 만에 하나 내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의문사를 당했다고 가정해 보세요. 억울하게 사망한 건 분명한데, 사망 원인이나 가해자를 찾지 못한다면 온 가족이 평생 속병, 화병에 시달리지 않겠어요? 법의학자는 피해자뿐 아니라 피해 가족을 위해선 더없이 필요한 의사죠.”

홍경수 교수는 이윤성 교수를 명의로 추천한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아무리 중요하고 필요한 분야이지만 의대 졸업생 중 법의학자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은 드문 게 현실입니다.

환자의 생명을 구하는 의료 행위는 무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만 사망 원인이나 가해자 신상을 찾는 일은 어두운 무대 뒤편의 일이라고 할 수 있어요. ‘나라도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명감으로 묵묵히 법의학자의 길을 걷고 있는 이 교수님, 정말 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명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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