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개혁 제대로 하자] 제자리 의료서비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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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의료개혁의 초점은 가격과 질이다. 가격만큼 서비스 질이 보장돼야 한다. 의료비에 대한 국민 부담이 늘어나도 의료 서비스가 제자리 걸음이라면 의미가 없다.

하지만 낮은 의료 서비스와 의료보험 재정을 축내는 고질적인 의료관행은 여전히 개선될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오히려 의약분업 후 사라진 약가 마진을 벌충하기 위해 과잉 및 신종 편법 진료가 곳곳에서 등장하고 있다.

◇ 의약분업 후 신종 편법 진료 등장〓 "이젠 약값 마진이 없어졌으니 검사를 늘리는 것밖에 살 길이 없다."

"16~30일 처방료는 8천5백원이지만 31~60일 처방료는 1만2천원이다. 모든 처방은 현행 한 달 단위에서 5주 단위로 바꿔라. " 이 달초 모 종합병원 의사들에게 내려진 이사장 명의의 지침이다. 병.의원과 약국간 담합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대한약사회가 파악한 것만 5백여건. 특정 약국만 구할 수 있는 약을 처방하거나 허위 환자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경기도 K병원은 제약회사 두 곳의 약을 주로 처방해주고, 구급차 3대를 협찬받기로 했다. 서울 강서구 S의원은 제약회사에 리베이트를 요구했으며, 재고 약품을 반품하지 않고 인근 약국에 현찰로 파는 무자료 거래를 했다.

병원들의 고가장비 구입도 늘어났다. 지난달 한대에 10억원이 넘는 자기공명영상(MRI)촬영 장치를 구입하겠다고 보건복지부에 신청한 병원이 34곳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4배나 많았다.

◇ 개선 조짐없는 고질적 과잉 진료=콘택트 렌즈를 착용하는 朴모(27.회사원)씨는 최근 정기 검진차 동네 안과를 찾았다가 '각막염'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안과에서 새 렌즈를 구입하라고 자꾸 권유하는 게 이상해 다른 안과를 찾아갔더니 '정상' 이라고 했다.

金모(70)씨는 올 봄 백혈병으로 한 대학병원에 47일간 입원했다. 金씨 부담금 9백50만원 중 병실료가 5백30만원으로 진찰료보다 많았다.

입원했던 무균실은 일반병동 한 구석을 유리 칸막이로 막아 놓은 것에 불과했지만 병원측이 2인실로 꾸며 놓아 보험 혜택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근 방한한 재미 신경과 전문의 金모씨는 단순 두통환자에게 40만원씩 하는 MRI 검사를 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대부분의 두통은 의사 진찰만으로 충분하다" 고 말했다.

◇ 세계 58위 의료 수준=서울 모 종합병원은 40대 양성종양 환자에게 항암치료를 해왔다. 이를 안 다른 의사가 문제삼자 담당의사는 "암인줄 알고 계속 치료해왔는데 이제 와서 그만두자는 말을 어떻게 하느냐" 고 묵살했다. 그 환자는 3주마다 1주일씩 입원, 뼈가 타는 통증을 견뎌내며 항암치료를 받아야 했다.

의료 소송 건수가 1998년 5백42건으로 10년새 8배나 늘었다. 이종태 한국의료평가센터 소장은 "상당수 의사가 내시경과 초음파 검사를 하지만 검사 결과를 제대로 판독하지 못해 치료기회를 놓치고 있다" 며 "의약분업에 앞서 의료수준을 높여야 한다" 고 주장했다.

◇ 설명 부족.불친절 여전=秦모(33.주부)씨는 K병원에서 여섯살난 딸아이의 중이염을 반년여 치료하다 안 낫자 답답한 마음에 의술이 뛰어나다는 S대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몇시간 기다려 만난 담당의사는 아이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대뜸 반말로 "K병원에서 치료하지 여기는 왜 왔느냐" 며 돌려보냈다.

퇴행성 관절염을 앓고 있는 李모(64)씨는 지난 22일 서울 S병원에서 상태를 물었다. 담당의사는 거두절미한 채 "죽을 때까지 무릎이 아플 것" 이라는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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