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남북 문화교류 제대로 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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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북한의 조선국립교향악단이 어제 저녁 KBS홀에서 역사적인 서울 공연을 했다. 오늘과 내일 이틀간 KBS교향악단과 합동공연도 열 예정이다.

직항로로 평양에서 날아온 북한 교향악단이 서울시민들 앞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은 불과 몇달 전만 해도 상상조차 못한 '사건' 이다. 6.15 선언으로 조성되고 있는 남북 화해 분위기의 다른 단면을 보는 느낌이다.

분단 55년의 이질성을 해소하고 남북 통합과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활발한 문화교류가 절실하다는 데 이견을 달 사람은 없다.

공연.예술분야든 학술.종교, 문화재 교류든 동질성 회복을 위한 남북간 문화교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본다. 하지만 마치 봇물이 터진듯 쏟아지고 있는 지금의 이벤트성 문화교류에는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북한 교향악단의 이번 공연만 해도 그렇다. 당초 2백만달러를 주기로 하고 공연을 기획했던 민간기획사가 정부와 KBS, 북한의 조선 아태평화위원회를 상대로 공연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가 기각되는 소동도 있었다.

돈 많이 주는 데로 갈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 북한측 입장이라는 얘기가 들리는 걸 보면 결국 정부와 민간업체가 '웃돈' 경쟁을 벌인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산가족 상봉단에 포함돼 서울에 왔던 북한의 공훈미술가 정창모씨의 개인전이 위작(僞作)시비에 휘말려 무산되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다른 한편에선 방송 프로그램의 북한 제작을 둘러싼 방송사간 경쟁이 과열양상을 보인다고 한다. 밖으로 알려지지 않아 그렇지 이런 식의 문화교류 사업이 물밑에선 치열한 경쟁을 벌이면서 갖가지 잡음과 뒷소문을 낳고 있다.

상업주의와 한건주의가 뒤엉킨 부문별한 문화교류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문화교류의 투명화.제도화.체계화가 시급하다. 북한 창구는 아태평화위로 단일화돼 있는 반면 우리 쪽에는 문화교류를 명분으로 이 기회에 돈벌이를 해보자는 민간업체들이 우후죽순처럼 난립해 있다.

너도나도 달려들어 경쟁을 벌이다 보니 교류사업 자체의 가치는 뒷전이고 웃돈 경쟁만 성행하는 쪽으로 치닫기 쉽다. 반면 북한은 시혜적 입장에서 적절히 경쟁을 부추기며 상황을 즐기고 있는 꼴이다.

통일부가 독자적인 판단으로 문화교류 사업자를 선정하고 개별사업 승인을 내주는 현행 체제로는 무분별한 경쟁을 막고 사업의 옥석을 가리기 어렵게 돼 있다.

가장 좋은 것은 민간이 자율적으로 교통정리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게 어렵다면 각 문화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된 독립적인 민간 심의위원회를 설치함으로써 사업의 중복성을 피하고 타당성을 따져보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더 이상 방치할 상황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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