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라씨 연극인생 되짚은 '막이 내리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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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른바 유명인들이 쓴 에세이를 읽다보면 '잘난 척' 하는데 질리기 일쑤다.

적어도 이 책은 "그렇지는 않다" 고 잘라 말할 수 있다.

유려한 문체는 아니지만 군더더기 없는 담백한 글솜씨와 대필의 흔적이 없는 진솔함이 인상적이다. 그래서인지 지인(知人)을 줄줄이 내세운 추천사 한편 없는 배짱도 좋게 보인다.

익히 알려진 바, 저자 김아라(44)씨는 한국을 대표하는 여성 연극 연출가 중의 한 명이다. 자신만의 연출언어를 가진 사람이라는 평가도 따라 다닌다.

도제(徒弟)적 풍토가 잔존하고 있는 보수적인 연극계에서 김씨는 자신의 독특한 연극세계를 가꿔온 '프로' 다.

이 책은 연극쟁이 김씨 자신의 연극사적 기록이다. 1986년 데뷔작인 '장민문신' 에서부터 올 5월 공연한 '봄날' 에 이르기까지 총 19편의 연출작에 얽힌 에피소드를 73편의 간결한 글로 옮겼다. 작품의 내용과 등장 인물에 관한 촌평을 적절히 섞어 짧지 않은 자신의 연극사를 정리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에 끌리는 것은 연극에 대한 저자의 육화된 사유의 흔적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막이 내리면 '그' (연극.극중 인물)를 잊어야 하는, 현실과 무대의 이상한 불일치 속에서 김씨는 삶의 화두 하나를 발견했다.

"내가 연극이고 무대가 진실이다." 현실을 반영하는 연극에서 그 현실의 허구성과 누추함을 체험하는 일이야말로 연극이 지향하는 의미심장한 목표가 아닌던가.

글 '연극을 왜 하느냐구요?' 에 김씨는 이렇게 적었다.

"영감으로 가득 찬 사람들과 만나는 행복, 그들과 뒹굴면서 온갖 치부를 다 드러내놓고 웃어 넘기는 정직한 행복, 그런 뜨거운 만남을 가질 수 있는 게 연극말고 또 뭐가 있을까. "

그러고 보니 김씨는 배우와 작가.스태프를 지독히 사랑하는 연출가인 것 같다. 이런 포용력 때문에 그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연극이 끝나기 전에 죄다 그녀의 포로가 됐다.

'메디아 환타지' 의 강수연, '사로잡힌 영혼' 의 신구, '오이디푸스 3부작' 의 남명렬, '숨은 물' 의 방은진, '에쿠우스' 의 최민식이 그랬다.

글 곳곳에서 이들에 대한 김씨의 지극한 애정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김씨를 일러, 극작가 이강백은 "화산 같은 여자" 라고 표현했다.

김씨는 현재 경기도 안성 죽산에 살고 있다. 그의 이웃에는 막강한 '예술동지' 인 무용가 홍신자와 작곡가 임동창 등이 모여산다.

10여년 전 땅을 마련, 97년부터는 자신의 극단 이름을 딴 '무천캠프' 라는 야외극장을 세워 여러 장르가 어울리는 새로운 음악극을 개발.실험하고 있다.

김씨의 대표작 '오이디푸스 3부작' '인간리어' '햄릿 프로젝트' 등이 태어난 곳이 바로 여기다.

이 작품들은 극성(劇性)이 풍부한 양식을 추구해온 김씨 특유의 연출관이 집약된 제의(祭儀)연극의 모색에 속한다.

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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