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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젊은 의사들의 항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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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의약분업이라는 새로운 제도가 8월 1일부터 우리나라 의료계에 도입돼 시행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지난 6월에는 잘못된 약사법에 항의해 전국의 병.의원들이 폐업을 단행하는 사태가 벌어졌고 이에 당국은 의약분업 본래의 취지에 맞는 약사법 개정을 약속했다.

그러나 약사법의 잘못된 개정에 항의하며 전공의.전임의들이 다시 병원을 떠나는 상황이 됐다.

환자를 아주 외면할 수는 없기에 응급실.중환자실의 진료에는 자원봉사의 형태로 참여하고 있다. 21세기 우리 의료계를 이끌어나갈 전공의와 전임의들이 의료현장을 떠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젊은 의사들은 현재의 의료계 상황아래서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혹독한 수련과정을 견뎌내며 전문성을 획득한 의료인들에게는 그들만의 자부심이 있다. 지금의 의료현실은 이들의 전문가적 자부심 조차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앞으로는 의사의 처방약은 동네 약국의 경영편의를 위해 6백개로 제한하라고 하며, 이의 선정마저 지역유지나 시민단체의 허락을 받게 됐다.

고도의 전문지식을 요하는 의학적 판단에 비전문가의 간섭이 우선해야 되는가. 난치병에 대한 새로운 치료법을 도입하거나 CT 등 고가의 검사를 해 이상 소견이 없으면 '불법진료.과잉진료 또는 부당진료 행위' 라 하여 의료비를 삭감하고 졸지에 부도덕한 의사로 전락시키는 현재 의료제도 아래서 젊은 의사들은 미래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문 직업인이 추구하는 가치의 척도는 돈 이외에 명예와 보람일 것이다. 명예와 보람은 전문가적 자부심이 전제돼야 한다.

의사처럼 사회에 꼭 필요한 전문가는 자신의 전문지식을 양심껏 펼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사회의 명예로운 존재가 된다.

젊은 의사들은 교과서적인 진료가 가능한 의료환경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잘못된 의약분업의 시행은 국민들에게 최선의 진료를 수행하려는 이들의 희망마저 허물고 있다.

의사를 둘러싼 의료환경이 아무리 열악해 지더라도 환자의 생명을 다룬다는 보람의 본질이 변하지 않도록, 사회적 이해와 전문 직업인에 대한 뒷받침이 절실히 필요하다.

환자에 대한 최상의 진료는 의사의 의무며 이상이다. 의료의 기회균등(equality)이냐, 양질의 의료추구(quality)냐를 선택해야 하는 현실에서 우리나라는 전자를 선택해 이미 국민 개보험이 시행된 지 오래다.

그러나 제한된 재원으로 전 국민에게 골고루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려니 많은 무리가 따르고, 결과적으로 원가계산이나 관행적 일반수가를 감안하지 않은 낮은 보험수가를 적용하고, 규격화된 진료제공을 요구하고 있다.

양질의 진료를 추구하거나 발전을 도모하는 것은 엄두도 못내고 병원 유지마저 어려운 형편이다. 그리고 이를 바로 잡고자 일시적으로 진료현장을 떠난 젊은 의사들은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정부가 최소한의 의료비만 부담하려는 정책을 바꾸지 않는 한, 우리 정부는 의료를 돈만으로 계산하고 국민의 생명을 담보로 의사에게 부당한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의료비는 국민의 삶의 질과 행복에 직결돼 국가가 적극적인 관심과 투자를 유지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부실기업에 쏟아 붓는 돈의 일부만을 투자해도 상황은 지금보다 훨씬 나아질 수 있다. 교육개혁의 이름 아래 밀어붙인 정책의 결과 공교육이 붕괴되니 어떤 결과가 초래됐는가.

우수한 교사의 이직(移職), 사교육비의 과도한 부담과 부유층 학생의 해외유학으로 이어지지 않았는가. 의료에도 똑같은 현상이 반복돼서는 안된다.

이제 우리 사회는 의료제도 개선에 대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야 할 시점에 있다. 현재와 같이 저수가를 고수하고 최소한의 진료만을 일률적으로 강요하는 보험제도는 국민들의 의료에 대한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미흡하다.

저소득층을 위한 최소한의 진료는 국가가 보장하되 양질의 진료를 갈망하는 국민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어떠한 방법으로 노력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또한 의료 후속세대인 전공의.전임의들이 확실한 비전을 갖고 수련과정을 이수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

즉 의사들이 전문가적 자부심을 갖고 교과서적인 진료를 제공할 수 있는 의료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정부와 의료계가 협의해 내놓아야 한다.

이종욱 <서울대 의과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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