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기획] 교민·한국기업 주로 상대 … 현지화 먼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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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2009년 2월 부임한 최창식 하나은행 인도네시아 법인장은 콧수염을 기른다. 콧수염을 기르는 이슬람 문화권의 풍습에 따라서다. 그는 “몸도 마음도 인도네시아 방식을 따르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하나은행 중국유한공사의 경우 직원 100여 명 가운데 90%가 현지인들이다. 삼성증권 홍콩법인의 임직원 60명 중 한국인은 3명뿐이다.

금융회사가 해외에 나가 현지 교민이나 한국 기업을 상대로 편하게 영업하던 시절은 끝났다. 이젠 현지화 단계다. 그것도 생존을 위해서다. 장기성 국민은행 캄보디아 법인장은 “교민, 한국 기업은 제한돼 있는데 프놈펜에만 국내은행이 다섯 곳”이라며 “현지화하지 않고서는 생존이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갈 길은 멀다. 금융감독원은 국내 은행 해외점포의 현지화 수준을 ‘낙제점’이라고 평가한다. 2007년 말 기준으로 은행 해외점포의 현지직원 비율은 47.4%에 불과했다. 총 운용자금 가운데 해당 지역의 고객을 대상으로 운용하는 비율도 36.2%에 그쳤다. 최성일 금감원 건전경영팀장은 “2009년엔 현지직원 비율이 50%를 넘은 것으로 집계됐지만 글로벌 은행에 비하면 아직 낮은 수준”이라고 말했다. 반면 한국에서 영업하고 있는 외국계은행 국내지점의 현지직원 비율은 90%, 현지자금운용 비율은 80%가 넘는다.

기업의 국제화 정도를 나타내는 ‘초국적화지수(TNI)’를 비교하면 차이가 더 벌어진다. 국내 은행 가운데선 2007년 말 기준으로 산업은행(11.62%)과 외환은행(11.14%)만 10%대였고, 4대 시중은행은 2~4%대에 머물렀다. 반면 2006년 말 기준으로 스위스 UBS의 TNI는 76.5%, 영국 HSBC는 64.7%였다. 상대적으로 국제화에 약하다는 일본 미쓰비시UFJ의 TNI도 28.9%였다.

베트남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내 금융사의 한 임원은 “지금까진 교민이나 한국 기업만 고객으로 잡아도 돈벌이가 됐다. 굳이 현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은행 해외점포는 매년 흑자를 내고 있다. 2008년의 경우 해외점포의 순이익은 3억1000만 달러(약 3700억원)였다. 그러나 이는 은행들이 국내에서 벌어들인 돈(6조962억원)의 6%에 불과하다.

반면 일본 노무라의 경우 리먼브러더스의 아시아 부문을 인수한 영향도 있지만 2009년 7~9월 매출의 절반을, 순이익의 75%를 해외에서 벌어들였다.

현지화에 뒤진다는 것은 고객을 빼앗긴다는 뜻이다. 현지에 투자하는 외국 기업들은 대개 글로벌 금융사의 고객이다. HSBC베트남의 경우 한국을 포함한 인터내셔널 데스크와 중국 데스크에 30명을 투입하고 있다. 베트남에서 신도시 개발 사업을 하고 있는 다이밍의 이영훈 사장은 “국내 금융사 대신 글로벌 금융사를 이용하는 한국 기업이 점차 늘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해외 진출 경험이 최소 수십 년이 된 글로벌 금융사와 우리 금융사를 같은 수준에서 비교하긴 어렵다. 그러나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의 경우 국내 금융사들은 해외진출 역사가 오래되지 않은 호주계 ANZ에도 밀리고 있다.

돈이 된다 싶은 곳엔 국내 금융사들이 앞다퉈 진출하는 바람에 한정된 교민이나 국내기업을 놓고 제 살 깎아먹기 경쟁을 벌이는 경우도 많다.

채수일 보스턴컨설팅그룹(BCG) 서울사무소·아태금융총괄 대표는 “지금까지 국내 금융사의 해외진출은 모양새 갖추기 성격이 강했다”며 “글로벌 금융사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장기적 관점에서 철저한 전략을 수립한 뒤 진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특별취재팀=김준현·김원배·김영훈·조민근·박현영·한애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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