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세상] 글맛 돋우는 이윤기 산문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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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요즘에는 이거다 싶은 소설도 없고, 좋은 작가도 없어."

웬만한 사람들이면 그런 말을 내뱉곤 합니다. 사실입니다. 기자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입니다.

황석영.김주영.이문열씨 등 한다하는 인기작가들은 대부분 70년대에 나와 '20년 장기집권' 하고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이들을 대체할 젊은피 작가들의 등장이 채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구조적 이유가 있습니다.

엄숙한 사회과학의 시대였던 지난 80년대는 활달한 상상력을 가로막은 '변비' 시대였습니다.

그랬더니 최근 10년새 우리 사회는 대중사회, 즉 '설사' 의 시대로 막바로 진입했습니다.

이 와중에 튀는 것만이 능사인 젊은 작가들의 실험은 안정적인 수요층을 확보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기에 문자의 시대가 가고 영상-이미지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문명의 계절 변화도 문학의 영향력을 막는 삼각파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 와중에 이윤기의 산문집을 여러모로 흥미롭게 봤습니다.

'잎만 아름다워도 꽃대접을 받는다' (동아일보사). 문학동네의 빈곤함에 실망한 독자들이 있다면 이 책을 한번 눈여겨 보실것을 권합니다.

작가 이윤기가 삼각파도를 뚫고 나온 흔지않은 생존자가 아닌가 하는 점을 확인해 보시라는 말 입니다.

헌데 이 책에서 이윤기는 지난 77년 신춘문예 등단이후 20년 가까이 창작활동을 하지 않은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듣기 따라서는 매우 오연(傲然)하게 들리겠지만, 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좀체로 문을 열어주지 않을 줄 알았던 문단의 낡은 문을 슬쩍 밀어보았더니 너무 쉽게 열렸다. 실망했다. 어마 뜨거워라 싶어 도망쳤다." 어떻습니까. 작가라면 이정도의 자부심은 멋진 겁니다.

그렇다면 이윤기는 문단데뷔 이후 남들이 거치지 않는 입산수도 20년(번역 20년)까지 마친 준비된 선수 작가인 셈입니다.

만일 '잎만 아름다워도…' 에서 글맛을 느끼셨다면 보다 더 뛰어난 산문집으로 '어른의 학교' (민음사) '무지개와 프리즘' (생각의 나무)등도 챙겨보시지요. 무더운 여름철, 책읽는 즐거움이 쏠쏠할 겁니다.

조우석 출판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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