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종수의 시시각각

또 한 해를 보내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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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여의도 정치판을 돌아보면 이 허전함에 답답함이 더해집니다. 일년 내내 드잡이 싸움 말고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는 국회에선 급기야 새해 예산안을 볼모로 잡고 한 해의 마지막 날까지 정쟁이 한창입니다. 겨우 회생의 싹이 보이는 경제에 찬물을 끼얹고, 열심히 살아보려 안간힘을 쓰는 국민들의 가슴에 끝내 대못을 박고서야 직성이 풀릴 모양입니다. 새해에도 이런 정치권에 무얼 기대할 생각일랑 아예 싹 접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면 허전하기는 해도 마음이 상하는 일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지난해 마지막 날 이 난에서 각자의 희망 목록 만들기를 권했습니다. 거창한 신년 계획 대신 반드시 이루지 못하더라도 평소에 해보고 싶었던 일들의 리스트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영화 ‘버킷 리스트(the Bucket List)’에서 따온 아이디어였습니다. 희망 목록은 기필코 해내야 한다는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고 결과에 대해 점수를 매길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그중에 다만 몇 가지라도 이루면 다행이고, 설사 이루지 못하더라도 크게 실망하지 않도록 말입니다.

혹시 올해 희망 목록을 만들었다면 얼마나 이루었는지 궁금합니다. 희망 목록 가운데 상당수를 이룬 분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이 ‘희망 사항’에 그친 분도 많았을 겁니다. 그래도 실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사실 희망 목록을 권한 진짜 이유는 희망을 이루자는 게 아니라 희망을 갖자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살아 있다는 자기 확신과 함께 힘겨운 삶을 지탱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희망이 있는 사람은 쉽게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준비하는 오늘, 희망 목록을 만들어 보시길 또 다시 권합니다.

올 한 해를 되돌아보면서 기억에 남는 외신 기사가 한 토막 있습니다. 지난 10월 미국 뉴욕타임스에 보도된 뉴욕의 통근열차 시간표의 비밀에 관한 기사입니다. 대부분의 뉴욕시민은 모르지만 출퇴근 시간 뉴욕의 맨해튼과 외곽을 잇는 통근열차는 열차시간표에 나와 있는 출발 시각보다 항상 1분 늦게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열차시간표에 오후 7시30분에 떠나도록 돼 있는 열차가 실제로는 1분이 늦은 7시31분에 출발하는 식입니다. 열차를 놓치면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는 승객 입장에서 이 1분은 중요한 회의를 망치거나 어쩌면 운명을 가를지도 모르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뉴욕의 철도회사가 출퇴근 시간에 헐레벌떡 달려오는 통근객들을 위해 의도적으로 출발시각을 1분 늦춘 것입니다. 이 비밀스러운 늑장 출발의 관행이 1870년부터 140년이나 이어져 왔다니 놀랍기 짝이 없습니다. 이 따뜻한 배려와 느긋한 여유가 참으로 멋진 전통을 세웠습니다. 우리의 출퇴근 전철이 이처럼 매번 늑장 출발을 한다면 문제가 심각하겠지만 새해에는 이런 배려와 여유가 우리 사회 곳곳에 번져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2009년을 숨가쁘게 달려왔지만 이제 2010년 새해 열차의 출발 시각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 열차는 아쉽게도 1분도 기다려주지 않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늦지 않게 새해 열차에 탑승하시기 바랍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김종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