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도시·풍경] 야간쇼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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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반짝 효자였던 태풍도 가고, 도시는 다시 데워지고 있습니다.

여름밤을 어떻게 식히시렵니까. 이른 저녁 먹고 가족끼리 동네 나들이는 어떨까요. 어두운데다 밤공기도 덥지 않냐구요? 거, 왜 있지않습니까. 해 진 뒤에도 훤하게 조명 밝혀놓고 에어컨 빵빵한 인근 대형할인매장 말입니다.

사위가 어두워가는 오후 8시. 서울 강서구 아파트촌 한가운데 자리한 할인점 입구에서는 짧은 치마의 여성 주차안내원들이 카세트며 앰프를 챙겨들고 하루 일과를 마무리합니다.

할인점 셔틀버스도 운행이 끝날 무렵이라 길게 늘어선 주부들의 행렬도 사라졌네요. 하지만 주차장에 들어서면 상황이 다릅니다. 빈 자리가 척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민소매 원피스의 아내와 반바지에 슬리퍼 차림의 남편, 그리고 자녀들이 한 조를 이룬 손님들이 줄줄이 들어서는 탓입니다.

'여성만의 천국' 이던 낮시간에는 보기 힘든 풍경이죠. 와이셔츠에 넥타이까지 맨 차림은 퇴근길에 직행한 맞벌이 부부일 터이구요.

쇼핑카트에는 아이들을 먼저 태웁니다. 여기에 수박 한 통, 대나무 카시트, 휴지 한 타래 만으로도 가득 차는 쇼핑카트 운전은 자연히 남편 몫이 되는군요.

"2주일에 한 번, 아니 3주일에 두 번쯤 옵니다. 식품위주로 사니까 한 번에 5만원쯤…. 낭비는 안해요. 값이요? 동네 슈퍼보다 싸지요. "

모처럼 일찍 퇴근해 부인과 세 자녀를 데리고 나왔다는 결혼 11년차 은행원 김성옥(42)씨의 말입니다.

무료주차에 야간영업뿐 아니라 이름부터 '싸다' 고 안심시켜주는 '할인' 점의 매력은 남녀를 가리지 않습니다.

"값이요? 동네 시장 안에 양판점이 더 싼 것도 많아요. 할인점과 경쟁하느라 장난감 가게도 1, 2천원 더 싸게 주기도 해요. 할인점이요? 같이 쇼핑하면 얘기할 게 많아지죠. 둘 다 쇼핑을 좋아하거든요. 아이만 해도 요즘 관심이 자동차냐, 로봇이냐, 비디오냐, 비디오 중에도 그냥 만화냐 공룡이냐 이런 걸 쇼핑가서 알게 되는 거죠."

두 아이를 키우는 결혼 5년차 주부 김근아(30)씨가 지적하는 할인점의 또다른 매력입니다.

매일 가는 동네 시장보기가 '일' 인 반면, 여기는 '가족나들이' 란 거죠. 실은 할인점측도 이미 눈치챈 흐름입니다.

할인점 한켠에 만들어놓은 식당가는 간편한 저녁을 즐기는 가족들로 매장보다 붐빌 정도군요. 처음 등장할 당시 창고식 매장에 대량묶음 판매, 회원제에 현금거래를 고집했던 1990년대 중반의 할인점과는 사뭇 달라진 풍경입니다.

그 덕일까요. '장보기' 라는 가사일도 자연스레 부부 공동의 일로 자리잡는 것 같습니다.

실내 놀이터도 생긴 덕에 아빠는 장보고, 엄마는 아이와 놀아주는 모습도 보이네요.

"가사분담이요? 글쎄요. 이런 데 와서도 맥주 한 박스만 달랑 차에 싣고 빨리 끝내라고 조르는 남편들도 있잖아요. 남편 연수 따라 몇 달 가봤지만 미국이 부럽더라구요. 품목이 많기도 하지만, 쇼핑에 남녀 구분이 없어요. 집에 필요한 물건이 뭐라는 걸 서로 아는 건, 그만큼 집안일을 나눠 한다는 거겠죠. "

음, 너무 할인점 예찬론에 기울었던 모양이군요. "백화점보다는 덜 하지만 소비를 자극하는 것도 사실이죠. 별 게 다 있으니까. 신형이 눈에 띄는 바람에 멀쩡한 샤워꼭지를 바꾼 적도 있고. 주말같이 붐빌 때는 쇼핑 자체가 엄청난 '일' 이에요. 계산대 줄이 좀 긴가요. 그러니까 한 번 가면 왕창 사는 게 이익이란 생각이 더 들죠. 돈버는 데도 열심이지만 물건 사는 데도 열심이구나 하면서 책에서 배운 '대량소비사회' 를 몸으로 느끼는 곳이에요. "

그 새 폐장시간 10시가 된 걸까요. 갑자기 팝송 '파이널 카운트다운' 이 흘러나옵니다.

아니, 아직 40여분은 남았는데. "직원들만 아는 신호예요. 오늘치 매출목표를 넘겼다는 거죠. 여름에는 오후 4~6시 보다 8~10시 매상이 더 많아요. 덜 더워서 그런 지 오늘은 음악이 좀 늦었어요. " 식품매장의 떨이장사는 9시부텁니다.

남대문 노점상 못지않은 직원들 몸짓이 일과 후 다소 피곤한 기색의 손님들을 활기차게 부릅니다. 30대 여성들인 계산대 직원의 손놀림도 빨라집니다.

6개월 전까지도 전업주부였던 계산원 이미진(36)씨는 오늘은 오후 4시에 출근한 '마감조' 랍니다.

3개월에 한 번 돌아오는 마감조 때는 남편이 퇴근 후 곧장 귀가하는 걸로 약속을 했답니다.

"요즘은 남자나 여자나 맞벌이에 공감하는 편이잖아요. 남편이 돈받는 것 말고도 다 해야한다고 그러더군요. 회식에는 안 가겠다고 했더니 가라면서요. 저녁이요? 미리 식탁에 차려놓고 나오면, 설거지는 해둬요. 여기 일이요?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데니까 좋지요. 일하면서 생활에 탄력이 생겼어요. 아침에 눈뜨면 나를 기다리는 곳이 있잖아요. "

어느새 10시. 하지만 손님도 직원도 그다지 서두르는 기색이 없습니다.

밖으로 나와 보니 이유를 알겠군요. 습기찬 공기가 후끈하게 덮쳐오면서 할인점 밤소풍의 끝을 알립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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