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김기범이 책벌레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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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나이 서른다섯의 남자가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야구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제 자신이 서글퍼지더군요."

프로야구 LG 김기범(35)은 한 때를 풍미했던 스타 플레이어다.충암고-건국대를 거치면서 청소년대표와 국가대표로 뽑혔고 LG시절에는 두차례나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이선희(한화 코치)와 구대성(한화)의 중간을 잇는 한국 야구의 ‘일본 킬러’ 계보에는 김기범의 이름이 들어간다.

그러나 최근들어 김기범은 야구공을 쥐는 것보다 책을 잡은 횟수가 늘었다.2년전 문득 “공부를 해야 한다”고 결심한 이후 경기시간 외에는 짬짬이 ‘책을 보는 연습’을 해왔다.

“다른 야구선수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학교는 다녔지만 ‘교육’을 받지는 못했습니다.나는 경영학과를 졸업했지만 경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사회에서도 정상적인 대학 졸업자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요.”

그가 ‘정상적인 교육’을 받기로 결심한 배경이다.그는 이달중 은퇴식을 갖고 다음달 미국 애틀랜타행 비행기를 탄다.야구 연수가 아니라 유학을 떠난다. 2년 정도 랭귀지 코스를 거쳐 정식으로 대학원에 진학해 학위를 따낼 계획이다.

올해 한국야구위원회에 등록된 선수 4백53명 가운데 대학 졸업자는 2백89명이다.전체의 86%.이들의 ‘전공’은 모두 야구다. 그러나 체력이 떨어지는 삼십대 중반이 되면 일부 슈퍼스타를 빼고는 대부분 인생에서 자신의 경쟁력을 의심하게 되고 ‘대책 없음’에 무기력해진다.

메이저 리그 최초로 연봉 2천만달러 시대를 열 것으로 보이는 알렉스 로드리게스(시애틀 매리너스)는 비시즌이면 마이애미-대이드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작문과 정치학 수업을 받는다.

1993년 웨스트민스터 고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직행, 슈퍼스타로 성장한 그에게도 정신적 공허감을 채워줄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미프로풋볼(NFL)에는 91년부터 폴 태글리어부 커미셔너의 지원으로 만든 ‘교육 지속 프로그램’이 있다. 프로선수와 가족들이 비시즌 동안 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교육 기회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8년동안 2천3백명의 선수와 가족이 혜택을 받았다.

이번 비시즌에는 지난 1월 테네시 타이탄스를 슈퍼보울에 진출시킨 슈퍼스타 에디 조지가 대학시절 채우지 못한 20시간 수업을 받기 위해 오하이오 주립대 토목공학과 강의에 출석, 뉴스가 됐다.

우리에게도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심재학은 변호사, 메이저리거 박찬호는 주미 대사,‘국민 타자’ 이승엽은 대구 시장을 꿈꿀 수 있을 날이 오길 기대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선수들은 현장생활후 ‘그 때’를 위해 팽개쳐둔 능력을 계발해야 한다.

프로야구 출범 19년째.가족·구단·사회·정부 모두가 합심, 그들이 그라운드에서 채우지 못하는 허탈감을 충족하고 성숙해지도록 돕는 체계적인 방법을 본격적으로 논의할 때가 됐다.

이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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