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어느 은행원의 고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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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구조조정을 하지 말자는게 아닙니다.관치금융으로 여기 저기 부실기업에 돈을 계속 퍼준다면 지금 구조조정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H은행 8년차 행원 이모씨(32)는 금융노조의 파업 개시가 시시각각 다가서면서 일이 손에 잡히지않는 모습이다.

그는 최근 며칠 간 말문을 닫고 지냈다.기자를 만나서도 한 동안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의료 대란 때 TV 앞에서 열을 냈던 그가 정작 은행 파업 대열에 참여하게될 줄은 몰랐단다.그러나 할말은 많다.

“지난 1998년 1차 구조조정때 정부가 시키는 대로 합병도 했고,40% 이상 감원(減員)도 했습니다.40명이나 되던 지점 직원 숫자가 20명으로 줄었어도 이제는 좋아질 것이라는 희망으로 매일밤 야근 해가며 일했는데 결과가 뭡니까.은행은 갈수록 부실해지고,그래서 또 나가라는 것 아닙니까”

이씨는 은행에 무더기 부실을 가져온 ‘관치금융’에는 책임규명도,재발 방지 확약도 없는 정부가 이번 총파업을 초래했다고 강조했다.

“관치금융으로 인한 부실과 간섭만 없애주면 우리 은행을 건강하게 되살릴 자신이 있습니다.만약 그러고도 2∼3년후까지 우량은행이 되지 못한다면 그땐 은행문을 닫아도 할 말이 없겠지요”

이씨는 이처럼 총파업 결의를 다지면서도 마음 한켠으론 고객들이 걸린다고 했다.

“지난 98년 5개 은행을 퇴출시킬 당시 시도했던 파업과는 분위기가 또 틀려요.창구에서 만나는 많은 고객들이 ‘관치금융 때문에 은행들 부실이 심해진 것을 국민들이 다 안다’며 격려합니다.하지만 자영업자나 중소기업 고객 중에 예금을 옮기는 경우가 있어 신경이 쓰입니다.어떻게 유치한 예금이요,고객들입니까.”

은행을 살리려는 파업이 장기화될 경우 혹여 은행을 망치는 일이 되지는 않을까하는 걱정이 머리 속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는 10일 저녁 아내가 챙겨준 세면도구와 속옷등이 든 ‘파업 가방’을 들고 집결지로 떠났다.노정(勞政)이 하루 빨리 대타협을 이끌어내 이씨의 고민어린 투쟁 역시 빨리 끝내주기를 기대해본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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