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세상] 쌈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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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상춧잎을 몇 장 겹쳐 찬밥 한 술 올려놓고 쌈장 듬뿍 찍어 '아' 하고 입을 크게 벌려 먹는 쌈밥. 별다른 찬이 없어도 밥 한 그릇이 금방 바닥난다.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한다' 는 말이 딱 어울린다.

땅에서 나는 채소 중에 잎이 조금 크다 싶으면 모두 쌈을 싸서 먹었을 만큼 쌈에 쓰이는 채소는 다양하다.

하지만 쌈하면 상추쌈이 으뜸이다. 우리가 상추를 먹기 시작한 것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록에 보면 고구려 사신이 수나라에 갈 때 특산인 상추씨를 가져갔다고 나와 있다.

삼국시대에 상추는 한민족의 식단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중국인들도 고구려인들의 상추를 잘 알고 그 씨앗을 구하는 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많은 돈을 주어야 살 수 있다는 뜻으로 상추를 천금채(千金菜)라고도 불렀다.

삼국시대에 상추쌈을 먹은 것으로 보아 쌈을 먹는 풍습은 적어도 2천년의 역사를 지닌다.

우리만의 독특한 음식 문화 가운데 하나인 쌈은 상추.깻잎.배추속대 등 채소로만 즐겼던 것은 아니다.

싱싱한 채소가 없는 겨울철에는 마른 나물을 불려서 싸먹거나 김으로 쌈을 즐겼다.

정월 대보름 풍습 가운데 배춧잎과 굽지 않은 생 김 그대로 큼지막하게 쌈을 싸서 먹는 '복쌈먹기' 라는 것이 있다.

과거 민중에게 밥이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지는 두말할 나위 없다. 그 밥을 큼지막하게 싸서 먹는 것은 곧바로 복을 싸서 먹는 것, 복을 담고 싶은 소박한 기원을 뜻하는 것이다.

이렇듯 일찍부터 우리 겨레의 입맛을 돋워온 상추쌈이지만 예의를 존중했던 조선시대에는 손으로 싼 상추쌈을 입 안 가득히 넣고 우물우물 먹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던 것 같다.

조선시대 '어유야담' 에는 고기를 구워 함께 쌈을 싸먹었다는 내용과 함께, 당시 양반사회에서 쌈을 먹는 것을 점잖지 못한 행동으로 여겼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쌈을 먹으려면 아무래도 입을 크게 벌리고 눈을 부라리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덕무의 예절에 관한 책 '사소절(士小節)' 은 "커다란 상추쌈을 싸서 먹는 부인의 모습은 아름답지 못하다.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그릇 위에 가로 놓은 다음 젓가락으로 쌈 두세 잎을 집어 밥 위에 얹어 먹는다. 장은 쌈을 입에 넣은 뒤 곧바로 젓가락으로 찍어먹는다" 고 먹는 방법을 상세히 적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입을 크게 벌려도, 하품을 크게 해서도 안 됐던 조선시대의 이야기. 상추쌈은 아무래도 상춧잎에 밥을 올리고 쌈장을 더해 꼭꼭 싸서 입을 크게 벌려 먹는 것이 먹음직스럽고 맛도 있다.

쌈은 서민들의 음식이었지만 지체 높은 임금님도 즐겨 먹었던 것 같다.

조선시대 마지막 한희순 상궁이 전해준 고종과 순종 때 궁에서 마련했던 상추쌈차림을 보면 여러 종류의 채소와 절미된장조치.병어감정.보리새우볶음.장똑또기.약고추장으로 영양이 골고루 들어간 영양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은숙 <음식전문잡지 월간 '쿠켄' 편집장>

▶이번 주말은…

조선시대 임금이 즐겼던 상추쌈 상차림을 재현해 보자. 우선 연한 상추와 깻잎.쑥갓.실파 등의 채소를 깨끗이 씻어 준비하고 절미된장조치를 만든다.

조치란 국물이 바특하게 끓인 찌개나 찜.조림 등 간이 센 반찬으로, 절미된장조치는 쇠고기와 표고버섯을 양념하여 뚝배기에 볶다가 된장을 쌀뜨물로 되직하게 개어 넣고 풋고추.홍고추.파를 넣어 끓인다.

병어감정은 병어를 살만 떠서 파.마늘.생강으로 양념한 뒤 국물을 적게 하여 고추장으로 간을 한 찌개다.

보리새우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볶다가 간장.소금으로 간을 한 뒤 물엿과 깨를 넣는다.

장똑도기는 쇠고기를 곱게 채썰어 양념한 다음 뜨겁게 달군 프라이팬에 볶은 뒤 물에 간장과 설탕을 넣어 만든 양념장을 자작하게 붓고 채썬 파와 마늘.생강을 얹어 조린다. 국물이 거의 졸면 참기름과 깨소금을 넣는다.

약고추장은 밑이 두꺼운 냄비에 고추장과 설탕.물을 약간 넣고 주걱으로 저으면서 볶다가 다진 쇠고기를 볶아서 합하고 참기름과 통잣을 넣고 잠깐 더 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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