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감추기 급급한 정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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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정 경제부 기자

지난 20일 오후 정부 과천청사 제3 브리핑 룸.

"지난해 9월부터 올 5월 사이에 국내 무역업체가 태국으로 불법수출하려던 시안화나트륨 71.2t을 국내에 회수했다. 북한으로 수출된 것은 한 건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전략물자 수출관리를 책임지고 있는 산업자원부 담당 국장은 당당한 표정으로 "이번 사건은 제3국을 통한 전략물자 불법수출을 봉쇄한 사례로 다자간 수출통제체제에서 '수범 사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고 말했다.

24일 오전 같은 브리핑 룸. 담당 국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보도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국내산 청화소다(시안화나트륨) 107t이 지난해 6~9월 중국 단둥(丹東)을 통해 북한으로 유출됐다. 이 물질은 사린가스보다는 약하지만 신경작용제인 타분(tabun)으로 만들 수 있는 위험물질이다."

불과 나흘 만에 산자부의 입장은 "없다"에서 "있다"로, 담당 국장의 얼굴 표정만큼이나 확연하게 바뀌어버렸다.

정부 스스로 테러에 이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의 수출관리에 실패했음을 인정한 것이다.

가뜩이나 '핵물질 융합 사건'으로 국제사회의 시선이 곱지 않은 마당에 전략물자 관리에 대한 정부의 어정쩡한 대응은 국가신인도를 더 떨어뜨릴 우려가 크다.

대규모 테러에 이용될 수 있는 민감한 물질이, 그것도 국내업체가 생산한 제품이 북한 손으로 넘어갔는데도 정부는 그동안 이를 감추기에 급급했다.

최초 확인단계에서 검찰 수사와 법원 판결까지 정부가 철저하게 비밀로 부친 이유에 대해 산자부 관계자는 "외국업체가 국내업체의 약점을 잡을 수도 있기 때문에 사법처리하는 선에서 매듭지으려 했던 것"이라고 해명했다.

이 관계자는 "남북관계의 경색을 우려해 일부러 발표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부의 이 같은 설명은 지난 8월 말레이시아를 통해 북한에 시안화나트륨이 수출됐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전략물자 관리에 어려움이 있다면 당연히 인력을 충원하고 시스템을 개선하는 노력을 먼저 하는 게 순서다. 당장 여론의 비난이나 국제사회의 질책을 받을 게 두려워 무작정 덮어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장세정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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