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 차례] 피곤한 숙명 '며느리의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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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목동에 사는 결혼 15년차 주부 김윤정(43)씨는 자신의 조카이자 신세대 주부인 박원희(31.결혼 4년차)씨를 아주 대견해 했다. 50~60대 어머니 세대가 걸어온 '며느리의 길'을 묵묵히 잘 걸어가기 때문이다.

김씨 본인은 시댁이 가톨릭 성당에 다닌 덕분에 명절 차례나 제사를 집에서 따로 지내지 않는다. 하지만 조카 박씨의 경우는 남편이 차남임에도 장남이 결혼을 안 했기에 맏며느리 역할은 고스란히 박씨 몫이다. 23일 오후 김씨 집을 찾은 박씨의 얘기를 들어봤다.

박씨:"결혼 이후 올해 세 번째 맞는 추석이에요. 장손 집안에 시누이가 네 명 있어요. 추석에 차례를 지내러 시댁에 가서 일하고 자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긴 해요. 가끔 '텔레비전이 없으면 얼마나 적막할까'하는 생각에 텔레비전이 고맙기도 하고요. 그래서인지 요즘은 명절 전이면 신경이 조금씩 예민해지는 것 같아요."

김씨:"차례를 안 지내는 나도 명절에 시댁을 간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느끼는 데 조카는 정말 대단해요. 대한민국 남편들은 아내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있겠지만 체면 때문에 못하는 것 같아요. 명절에 많은 일도 일이지만 그 같은 딱딱한 분위기가 며느리들을 더 힘들게 합니다."

서울 흑석동에 사는 결혼 9년차 맏며느리인 정수진(34)씨의 경우는 더 대단했다. 올해 역시 시할아버지와 시부모가 계신 경북 상주에서 추석 연휴를 보낼 예정이다.

정씨:"시아버지는 8남매의 장남이고 제 남편은 3형제의 맏이예요. 추석 때 직계 가족만 모여도 대가족이 어떤 건지 실감합니다. 일거리도 어마어마하죠. 시댁에 가자마자 '몸뻬 바지'부터 꺼내 입어요."

기자:시어머니 사랑을 독차지하겠네요. 일이 힘들진 않나요.

정씨:"결혼 직후 가진 첫 아이를 명절 지나고 나서 곧 낳았는데 그때 명절엔 조금 힘들었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언제부턴가 명절 쇠고 서울로 올라올 땐 말수가 점점 줄더군요."

정씨는 "시어머니께서 항상 '나 한 사람 고생하면 모두가 즐거워진다'고 하신 말씀을 명심하고 있다"며 "가끔 그 같은 말씀에 회의도 들고 화도 나지만 남편이 조금만 감동을 주면 풀어진다"고 말했다.

대단한 시어머니도 있다. 경기도 일산에 사는 김순희(69)씨는 아들이 결혼하기 전에 일년에 여덟 번 지내던 제사를 두 번으로 줄이는'제사 혁명'을 단행했다.

"며느리가 나와 같은 길을 걷지 않게 한 결정에 친지들도 동의했고, 조상님들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는다"면서 "나의 마음을 '고생'을 상대적으로 덜한 며느리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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