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가격 ‘듀얼 코어’ IT기업들, 세계가 좁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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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버가 독일 최대 서점업체인 후겐두벨에 e-북 ‘스토리’를 납품한 것을 계기로 최근 이 체인점 앞에서 현지 모델을 동원해 ‘스토리’를 홍보하고 있다. 1893년 뮌헨에서 설립된 후겐두벨의 지난해 매출은 2억6200만 유로(약 4500억원)다. 현지 스토리 판매가는 한국(30만원대)보다 비싼 279유로(약 47만원)다. [아이리버 제공]

올해를 빛낸 ‘IT 코리아’에 삼성·LG만 있는 건 아니다. 규모는 작지만 실력을 다져온 알짜 정보기술(IT) 업체들의 해외 진출이 연말을 맞아 잇따랐다. 세계시장 어디에 내놔도 통하는 기술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곳들이 늘어난 덕택이다.

올가을 e-북(전자책) 단말기 ‘스토리’를 출시한 아이리버는 지난달 말 독일 최대 서점 체인인 후겐두벨에 입점하는 데 성공했다.

후겐두벨은 독일 24개 지역에 38군데 직영매장을 운영한다. 이 나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과 시사잡지 ‘포커스(Focus)’는 ‘스토리’에 별 다섯 개 만점을 줬다. ‘기기 하단에 키보드가 있어 편리할 뿐만 아니라 독일 콘텐트를 별도의 파일변환 없이 지원한다’는 점을 높이 샀다.

아이리버는 여세를 몰아 이달 중순 영국 최대 서점체인 ‘워터스톤’에도 스토리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영국 전역에 20군데 매장이 있다. 아이리버는 이탈리아·러시아·미국·스위스 등의 유통업체와도 판매를 타진하고 있다. 아이리버의 임지택 상무는 “다양한 데이터 포맷을 읽을 수 있다는 점에서 아마존·소니·북켄의 e-북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전했다.

내비게이션 ‘아이나비’를 만드는 팅크웨어는 지난달 프랑스 르노자동차와 50억원 규모 이상의 내비게이션 소프트웨어(SW)를 공급하는 협의를 마쳤다. 내비게이션 SW는 지도를 재생하는 것은 물론 속도나 오일 등 차량 상태의 세세한 정보까지 알려준다. 이번 유럽 진출에 대해 회사 측은 “네덜란드의 톰톰 등 세계시장을 이끄는 글로벌 내비게이션 업체들과 경쟁해 선택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자평했다. 팅크웨어는 올해부터 르노삼성자동차의 준중형차에 순정 내비게이션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품질을 인정받았다.

3D(입체) 디스플레이 전문업체인 잘만테크는 독자개발한 3D 모니터를 일본 후지필름에 공급했다. 8월 잘만테크와 후지필름이 3D 디스플레잉 연구개발과 제품 공급에 관한 전략적 공급 합의 이후 첫 공급물량이다. 1차로 200대를 선적했다.

코원시스템의 mp3플레이어 ‘S9’은 이달 초 세계적 권위의 디자인상 ‘2010 iF 디자인상’을 받은 데 이어 프랑스 유명 문화상품 매장 ‘프낙(Fnac)’에 입점했다. 프낙은 구찌·이브생로랑 등을 자회사로 둔 PPR그룹의 유통 채널이다. 9개국 143군데에 오프라인 매장이 있다. 코원은 우선 프낙의 온라인 쇼핑몰에 입점한 뒤 내년 초 오프라인 진출을 계획한다.

중견 IT기업의 잇따른 승전보는 우리나라의 독립 중소업체의 층이 두터워졌다는 점에서 업계에선 반갑게 본다. 일각에선 삼성·LG 등 대기업 브랜드가 세계 TV·휴대전화·가전·반도체 시장을 휘저으며 형성한 ‘메이드 인 코리아’의 후광 효과도 있을 것으로 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의 배상근 경제본부장은 “중견 IT 업체들의 해외진출 성과는 중국의 가격경쟁력과 선진국의 기술·품질력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경제의 ‘넛 크래킹 ’을 타개하는 모범 사례”라고 평했다. 그는 “수출을 도왔던 환율효과(원화 약세)가 내년 사라질지 모르는데 그러면 기술경쟁력의 중요성이 더 부각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심재우 기자

◆넛크래킹(Nut Cracking)=호두까기 기계인 넛크래커 사이에 끼인 호두의 처지에 빗댄 말. 중국과 선진국 사이에서 변하지 않으면 깨질 수밖에 없는 한국경제의 상황을 표현했다. 1997년 외환위기가 직전 미국 컨설팅업체인 부즈앨런&해밀턴의 『한국보고서-21세기를 향한 한국경제의 재도약』에서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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