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피치] 투수나이 서른은 '잔치의 시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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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1998년 10월 당시 만 서른다섯살의 랜디 존슨(37)을 두고 메이저리그에서 돈싸움이 벌어졌다.

그해 시애틀과 휴스턴을 오가며 19승11패를 기록했던 존슨은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애너하임 에인절스.LA 다저스.텍사스 레인저스 등 4개 팀으로부터 입단계약 제의를 받고 신중히 팀을 선택했다.

현재 그가 뛰고 있는 다이아몬드백스였다. 계약조건은 역대 좌완투수 최고액인 4년간 5천만달러. 연평균 1천2백25만달러(약 1백35억원)였다.

당시 존슨의 계약을 두고 나온 반응은 "서른다섯의 노장에게 4년씩이나 투자할 가치가 있느냐" 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이아몬드백스는 존슨을 잡기 위해 4년을 보장했다. 도박이었다. 그리고 도박은 멋들어지게 적중했다.

존슨은 지난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17승9패)에 이어 올해에는 3일 현재 12승2패, 방어율 1.57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고 있다. 이런 페이스라면 2년 뒤 또다시 '대박(재계약)' 을 터뜨릴 수 있다.

존슨은 서른살 이전에는 한차례도 15승을 올리지 못한 대표적인 '늦깎이' 다.

그는 스물아홉까지는 삼진.볼넷이 들쭉날쭉한 불안한 투수였으나 카운셀링을 받는 등 부단한 노력 끝에 마운드에서 안정을 찾으며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국내 프로야구 초창기만 해도 선수들에게 서른은 '종점' 이었다. 원년 해태의 에이스 김용남은 만 서른에 글러브를 벗었고, 최동원(전 롯데)도 서른둘에 마운드를 내려갔다.

그러나 프로야구 출범 19년이 되면서 이제 서른은 '반환점' 이다.

올시즌 8연승에 방어율 1위(2.58)를 기록 중인 송진우(34)가 그렇고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한 조계현(36.두산)이 대표적이다.

조계현은 지난해 삼성에서 3패만을 기록해 "끝났다" 는 평가를 받고 퇴출당했다.

그는 지난해 연봉의 절반인 5천4백만원에 자신을 받아준 두산으로 이적했으나 올시즌 확실한 선발투수로 당당히 재기했다. 현재 통산 1백29승을 기록 중인 송진우는 2002년 초반이면 선동열의 프로야구 역대 최다승(1백46승) 기록을 깰 전망이다.

랜디 존슨과 송진우.조계현의 활약이 주는 메시지는 서른다섯, 그곳에 돈과 진정한 명예가 있다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프로야구에 뛰어드는 패기찬 젊음이 올려다 볼 거울이라고 할 수 있다.

94년 4월 텍사스주 샌안토니오의 한 자선행사에서 마이너리거 박찬호를 만난 '전설의 특급' 놀런 라이언이 해준 충고는 빠른 볼을 던지는 비법도, 삼진을 많이 잡는 노하우도 아니었다.

라이언이 가장 강조한 것은 "꾸준히 오래 선수생활을 하라" 였다.

투수에게 서른은 '잔치의 끝이 아니라 시작' 이다.

이태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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