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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ㅆ' 탈출도 통일과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흔히 컴퓨터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을 '컴맹' 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속사정을 알고 보면 '키맹' 일 경우가 많다.

키보드를 칠 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컴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컴퓨터가 아니라 타자기도 못치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글씨를 쓸 줄 알아도 타자기나 컴퓨터의 자판 앞에서는 까막눈과 다를 게 없다. 자판만 칠 줄 알면 컴퓨터는 다른 가전제품과 다를 것 없이 누구나 쉽게 다룰 수 있다.

휴대폰은 우리나 일본이 미국보다 그 보급이 앞서 있는데 컴퓨터에서 뒤처져 있는 이유도 그 점에 있다.

컴퓨터가 등장하기 거의 백년도 전에 이미 서양사람들은 타자기를 사용했다.

타자기로 맨 먼저 글을 써서 발표한 작가가 바로 '톰 소여의 모험' 을 쓴 마크 트웨인이었다고 하니 미시시피강을 화륜선이 왕래하던 때가 아닌가.

더구나 QWER같이 복잡하게 영문자가 배치돼 있는 오늘날의 그 컴퓨터 자판도 알고 보면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다.

기술이 빈약해서 자판을 빨리 치면 문자를 찍는 강철 줄들이 서로 뒤엉키기 때문에 그것을 방

지하기 위해서 되도록 까다롭게 자판을 배열한 것이다.

어쨌든 컴퓨터가 아랫목 차지를 하고 난 오늘날에도 키보드 인터페이스만은 여전히 톰 소여의 친구인 것이다.

그 바람에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자의 기계화가 어려워 타자기 전통이 없었던 한국과 일본에 있어 키보드 인터페이스는 정보화의 커다란 핸디캡으로 작용해 왔다.

문맹자는 서양에 비해 훨씬 적은데 키맹.컴맹률은 우리쪽이 훨씬 높다.

국력을 좌우하는 정보화가 키보드에 있는데도 이 사실을 깊이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은 것 같다.

그 증거로 우리나라 컴퓨터 자판은 아직도 두벌식.세벌식으로 통일돼 있지 않은 상태며 문자의 배열조차 불편하기 짝이 없다. 무엇보다도 한글을 타자할 때 가장 까다롭고 오타가 많이 나오는 것이 쌍시옷이다.

우리 글은 평서문의 종지형 어미들이 거의 다 쌍시옷 받침으로 돼 있다.

'있다' '있었다' '있었었다' 를 비롯해 '했다' '왔다' '갔다' 등 모든 서술어에는 쌍시옷 받침이 감초처럼 따라다닌다.

이렇게 많이 치는 글자인데도 일일이 시프트 키(변환키)를 쳐주도록 돼 있다.

"글씨를 썼었다" 와 같은 간단한 글을 치려면 적어도 변환키를 네번씩이나 눌러줘야 한다.

컴퓨터를 사용하는 데 제1조건은 한번이라도 키를 덜 치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보다 몇배나 간단한 영자 키를 사용하는 영어권 젊은이들도 YOU를 U로 EASY를 EZ로 친다. 우리는 e-메일을 하고 채팅할 때마다 서양사람보다 몇십배나 더 시프트 키를 많이 눌러야 한다.

인터넷 접속 인구가 1천만을 돌파했다는데 그 시간과 에너지의 낭비가 얼마나 큰가.

그래서 n세대들은 쌍시옷의 거북한 맞춤법을 홀가분하게 벗어버리고 아예 '잇다' '잇엇다' 로 쳐버린다.

손목에 차는 모바일 컴퓨터나 PDA, 그리고 웨어라블 컴퓨터 같은 차세대 통신기기들에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키보드 인터페이스다.

일본이 개발한 아이모드로 휴대폰은 이제 인터넷의 단말기로 변했다. 전화번호를 누르기 위해서 일반전화는 왼손으로 들고 걸지만 휴대폰은 오른 손에 들고 한 손으로 번호판을 찍는다.

인터넷과 접속하게 되면 문자입력을 더 많이 하게 되므로 한손 입력의 문자판 시스템이 개량돼야 한다. 그런데 현재의 휴대폰 한글 입력은 로제타스톤을 해독하기보다 힘들게 돼 있다.

문자입력.음성입력 키보드 인터페이스의 혁명바람이 불고 있다.

다른 것은 남이 개발한 것을 써도 한글입력시스템만은 목마른 우리가 팔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남북 정상회담의 어젠다에 어떤 것이 들어가게 될지 모른다. 하지만 컴퓨터의 한글자판 통일이나 차세대의 문자.음성입력 시스템 같은 것들은 반드시 남과 북이 함께 걱정하고 함께 해결해야 할 민족의 과제다.

쌍시옷에서의 탈출-통일문제는 의외로 이렇게 작고 쉽고 그리고 가까운 곳에 있다.

이어령 <새천년준비위 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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