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사막 남극을 찾아서] ⑧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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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와 같이 세종기지에 들어온 하계대원들 가운데 몇몇이 도착하자마자 생활동 앞 공터에서 땅을 팠다. 삽과 곡괭이로 열심히 파는데 결코 쉽지 않았다. 이 곳 킹조지 섬은 땅속 얼음이 1년 내내 녹지 않는 ‘영구동토층’이다.


추운 날씨에도 땀을 흘리며 곡괭이질을 하던 대원들은 결국 포기하고 세종기지 부두공사를 위해 한국에서 온 엠에이디종합건설 직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들은 포크레인으로 금방 땅속 1.5m 가량을 팠다. '포크레인 앞에서 삽질하기'가 무모한 짓이라는 걸 직접 목격하는 순간이었다.

그 구덩이에 거푸집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붓더니 천막으로 ‘꽁꽁’ 둘러쌌다. 추운 날씨에 콘크리트가 잘 굳지않아 보온하기 위해서다.


며칠이 지난 아침에 보니 그 곳에 표면이 매끈한 검은 돌이 솟아있었다. 크기는 30cm 정도로 원뿔이 중간에 잘려나간 모양이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남극 세종과학기지 기준점’이라고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무슨 기준점일까?

작업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세종기지가 위치한 킹조지 섬은 물론이고 향후 남극 대륙 전체가 포함된 지도를 만드는데 사용되는 기준점이란다.

그 동안 남극 연구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지도를 활용했다. 세종기지 인근의 동식물의 서식 위치와 주변 산과 계곡 등의 지형을 외국 지도 위에 표시한 것이다.

외국에서 만든 지도를 사용해도 별 문제는 없다. 그럼에도 우리 자체적으로 지도를 만들 필요가 있단다. 주인이 없는 남극의 지도를 만들고 이를 지속적으로 관리하면 국제사회에서 일종의 기득권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1959년 체결된 남극 조약에 따라 남극에서의 자원개발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출입마저도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언젠가 다른 대륙에서 캐낼 수 있는 자원이 고갈되면 조약 협의국들이 남극을 개발하자고 협의할 수 있다. 그럴 경우 기득권을 가진 나라가 자원개발에 적극 참여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면 손 놓고 쳐다볼 수밖에 없다. 남극 지도를 만드는 것은 남극을 꾸준히 연구하고 보호하는데 한국이 앞장서 왔다는 중요한 증거다.

이번에 만들어지는 지도는 축적이 1대 5000과 1대 2만5000으로 세밀한 지도에 해당된다. 세종기지 주변을 세세하게 나타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또 컴퓨터를 활용하면 세종기지는 물론이고 세종기지 주변의 서울봉과 식수원으로 만들어 놓은 현대호 등 세종기지 주변의 산과 지형을 입체적으로 그릴 수 있다.


하계대원들은 통합기준점 외에 과학 연구에 필요한 위성기준점과 조위관측소 등도 설치했다.

위성기준점은 위치추적시스템(GPS) 안테나와 수신기를 이용해 365일, 24시간 GPS 위성신호를 수신 저장하는 곳이다. 조위관측소는 해수면의 변화, 즉 조석을 관측하는 곳으로 취득된 자료로부터 기분 해수면을 산정할 수 있어 지구 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상승, 지각변동, 폭풍, 해일 등을 지속적으로 감시할 수 있게 된다.

박지환 자유기고가 jihwan_p@yahoo.co.kr

*박지환씨는 헤럴드경제, 이데일리 등에서 기자를 했다. 인터넷 과학신문 사이언스타임즈에 ‘박지환 기자의 과학 뉴스 따라잡기’를 연재했다. 지난 2007년에는 북극을 다녀와 '북극곰도 모르는 북극 이야기'를 출간했다. 조인스닷컴은 내년 2월 초까지 박씨의 남극 일기를 연재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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