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3부자 동반 퇴진의 허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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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현대그룹이 정부와 일반의 예상을 깨고 정주영(鄭周永)명예회장 3부자의 동반퇴진을 포함한 강도 높은 구조개혁 방안을 발표하고, 정부와 채권금융기관들이 여기에 즉각 긍정적 반응을 보인 것은 그동안 우리가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답습해온 문제해결 방식에 비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동안 우리는 한보와 기아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보다 최근에는 삼성자동차와 대우그룹의 처리과정에서 적지않은 시행착오를 경험했다.

문제를 대화와 타협을 통해 합리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소승적인 조직 이기주의와 마찰, 윽박지르기와 버티기로 문제해결을 지연시켜 사태를 더 악화시키고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을 치렀던 것이다.

이번 현대그룹의 자금난도 역시 초기에는 과거와 같은 윽박지르기와 버티기 조짐이 있었지만 종래와는 달리 정부도 자제하는 모습을 보였고 현대그룹도 여론과 정부의 요구에 대해 적극적인 수용자세를 보였다.

그것은 현대그룹 문제와 함께 야기된 금융시장 불안과 경제위기설, 임박한 남북정상회담 때문에 이전의 다른 기업 위기 때와는 달리 당사자들이 문제를 조속히 마무리해야 하는 부담을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그동안 기업구조조정 과정에서 마찰적이고 대립적인 개혁이 득보다 실이 많았던 데서 얻은 학습효과도 어느 정도 있었다고 여겨진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권위와 체면을 유지했고, 명분을 얻었다.

특히 현대그룹의 최고 실력자 세사람을 은퇴시키는 재벌개혁의 최대 전과를 올렸다.

현대그룹은 자칫 대형사고로 이어질 수도 있었던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시장신뢰 회복의 필요조건인 정부의 축복을 얻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 정주영 명예회장 일가 3부자의 경영일선 퇴진 선언이 과연 우리나라 재벌지배구조 변화의 전환점이고 기업집단의 해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될지는 좀 더 두고 보아야 한다.

사실 우리나라 재벌총수가 경영 위기나 여론의 압력에 의해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선례가 없는 것이 아니다.

지난해에 대한항공 사고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한진그룹 총수 부자가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그러나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기업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이나 정부나 조직에 대한 지배권은 인사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번 현대그룹의 발표에서도 명백히 하고 있듯이 정씨 일가는 지배주주로서의 권한과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경영진의 선임과 해임에 지배주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

다만 종래에는 절차를 무시한 채 총수의 말과 뜻이 그대로 그룹의 의사가 되었지만 앞으로는 일정한 절차에 따라 현대그룹의 의사가 결정된다는 것이 달라지는 점일 것이다.

이번에 鄭씨 세사람이 경영일선에서 퇴진하고 전문경영인이 경영을 담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전문경영인들이 鄭씨 일가의 눈치를 계속 봐야 하는 현실은 별로 달라지지 않을 것이고 여전히 鄭씨 일가의 뜻이 현대그룹의 의사가 되는 것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지배주주 일가를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했다고 해서 기업 지배구조 개혁이 성공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을 투명하게 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소재를 분명하게 하는 것이 지배구조 개혁의 핵심이 돼야 하고 그것은 경영을 누가 하는가와는 무관한 이야기다.

소위 왕자의 난이 벌어졌을 때 정주영 명예회장이 이사회나 주주총회 같은 절차를 무시하고 말 한마디로 정몽헌(鄭夢憲)씨를 그룹회장으로 지명한 것이 전근대적 지배구조와 황제경영의 전형인 것으로 많은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었다.

그러나 이번에 다시 정주영 명예회장이 두아들도 모르는 사이에 정당한 절차 없이 동반퇴진을 발표한 것도 따지고 보면 똑같은 형태의 총수 전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이번에는 鄭명예회장의 이런 결정이 마치 재벌개혁을 위한 용단으로 정부와 여론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은 역설이다.

그렇다면 이번 일을 계기로 과연 우리가 원하는 재벌개혁의 참모습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김종석 <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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