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지역 화섬업체들 '비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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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폴리에스터 원사(原絲)를 주로 생산하는 구미지역 화섬업계가 비틀거리고 있다.

국내 화섬업체는 모두 12곳. 그 가운데 8개가 구미에 밀집해 전자산업에 이어 구미경제를 이끌어가는 주요 산업이다.

지난달 초 구미지역 중견 화섬업체 금강화섬이 적자에 허덕이다 마침내 화의를 신청하자 업계 관계자들은 "마침내 올 게 왔다" 며 시름에 젖어 있다.

금강화섬처럼 뒤늦게 화섬에 뛰어들어 폴리에스터 원사만을 생산하는 후발업체들은 요즘 걱정이 태산이다. 공급과잉과 원가상승 압박 때문이다.

◇ 현장에서 본 '6월 고비설' 〓지난달 26일 오후 썰렁한 분위기가 감도는 구미공단 화섬업체들을 둘러보았다.

후발업체로 폴리에스터 원사를 생산하는 한국합섬 박노언(朴魯彦.48)지원부장은 "버티기 힘든 상황까지 왔다" 며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는 "2~3개 업체는 6월이 고비" 라며 "공급과잉으로 재고가 쌓이고 이를 견뎌낼 수 있는 자금이 바닥났다" 고 하소연했다.

IMF 관리체제 이후 자기부채 비율을 낮춰야 하는 상황에서 금융권에 돈 빌리기가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렵다는 것이다.

재고도 골칫거리다. 적정 재고량의 2배가 넘는 양이 쌓이자 하는 수없이 하루 생산량의 10%를 이미 줄였다. 朴부장은 "재고 처리 때문에 일부 업체가 덤핑공세를 벌여 시장질서마저 무너졌다" 고 개탄했다.

폴리에스터 원사와 나일론 등을 생산하는 국내 첫 화섬업체 ㈜코오롱 공장을 들렀을 때는 포장된 폴리에스터 박스가 창고 천장 높이의 3분의 2에 달하는 모습이 보일 정도였다.

창고 관계자는 "그전 같으면 8t 트럭이 줄을 서서 기다릴 만큼 재고가 쌓일 겨를이 없었는데 요즘은 생산물량을 줄여 오전이면 작업이 끝난다" 고 말했다.

코오롱 하명직(河明直.34)과장은 "지난해 하반기부터 숨이 찰 정도" 라며 "생산량을 줄이는 것 말고는 뾰족한 대안이 없다" 고 말했다.

구미상공회의소도 8개 화섬업체(코오롱.효성.새한.동국합섬.한국합섬.대하합섬.성안합섬.금강화섬)의 생산.고용 등 경제비중이 구미 전체에서 8~9%를 차지하는 데다 협력업체가 많아 화섬업체의 동향 파악에 비상이 걸렸다.

구미상의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부터 곪은 상처가 터지기 시작했다" 며 "인건비도 제대로 주지 않는 업체가 있다는 등 불길한 소문이 끝없이 이어진다" 고 걱정했다.

◇ 공급과잉.원가상승이 원인〓80년대 이후 여러 업체들이 폴리에스터 원사 생산에 뛰어들면서 국내 생산량이 급증했다.

한국화섬협회에 따르면 1996년 8월 국내 하루 생산량이 3천6백여t이던 것이 지난해 8월에는 20%가 늘어 4천4백여t에 이르렀다. 올해 들어서도 달라진 게 없다.

지난해 1.4분기까지만 해도 생산량이 34만4천여t에 그쳤던 것이 올 1.4분기에는 38만7천t으로 무려 13%나 늘어났다. 반면 국내 직물업체들의 잇따른 도산으로 내수시장은 위축되고 자국 섬유산업을 발전시킨다는 움직임이 일면서 중국 등 해외시장 수출도 감소했다.

이같은 여건에서 연일 늘어나는 재고량은 업체를 짓누르고 있다. 지난해 1.4분기 국내 전체 재고는 4만8천여t이었으나 올 1.4분기에는 6만3천여t으로 30% 폭증했다.

구미상의가 이달 초 지역 8개 업체의 재고량을 조사한 결과 업체에 따라 적정 재고량인 일주일 생산량보다 적게는 15%에서 최고 3백%까지 많았다.

설상가상으로 유가까지 상승, 수입에 의존하는 원료 가격이 폭등한 것도 채산성을 악화시키고 있다. 코오롱의 경우 원사의 원료가 되는 나프타의 일종인 TPA 가격(t당)은 98년말 3백85달러에서 지난 4월말 5백70달러로 치솟았다. 또다른 종류인 EG는 4백달러에서 6백30달러로 껑충 뛰었다.

코오롱 河과장은 "매출이익이 15% 이상은 돼야 채산이 맞는데 현재는 11%에 지나지 않는다" 고 말했다.

◇ 대책은 없나〓공급 물량을 줄이는 게 급선무다. 이를 위해 화섬업계 대표들이 최근 모임을 갖고 이달부터 20% 감산에 합의했다.

한국화섬협회 관계자는 "현재로선 감산을 통해 발등의 불부터 끄는 것 외에는 별다른 대책이 없다" 며 "업체 대표들이 중.장기적인 대책이 필요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도 나왔으나 의견이 모아지지는 않았다" 고 말했다.

감산과 함께 중.장기적인 대책으로 합병 등을 통해 과잉 생산시설을 줄여나가자는 업계 구조조정도 거론되고 있다.

화섬업계 관계자는 "선발업체를 중심으로 합병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며 "주도권을 잡기 위한 신경전 때문에 아직 논의 수준" 이라고 말했다.

구미상의 조사진흥팀 곽공순(郭孔淳)부장은 "다른 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기 위해서도 연구.개발을 통한 신소재.신제품 개발도 뒤따라야 한다" 고 말했다.

하지만 신소재 개발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데 이 돈이 어디서 나오겠느냐는 것이 화섬업계의 고민이다.

안장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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