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 키워드로 읽는 과학책 <10·끝>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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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갈릴레이 망원경 발명 400년, 다윈 탄생 200년. 과학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이 남달랐던 2009년도 끝나가고 있습니다. 중앙일보와 ‘문지문화원 사이’가 매달 연재한 ‘10개 키워드로 읽는 과학책’ 시리즈가 마지막 ‘키워드’를 던집니다.

3대가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들여다 보자. 서로 닮은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할아버지나 아버지에게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특징도 아들이나 손자의 얼굴에서 읽을 수 있다. 같은 점을 보존하지만 다른 점이 추가되는 게 생식과 유전의 비밀이다. 그 비밀은 DNA라는 유전물질을 통해 세대를 잇는다. 부모의 유전자에 의해 후세의 모든 형질이 결정된다면 우리의 운명은 태어나기 전부터 결정돼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대한 표준적 해석은 이렇다. “유전자는 모든 생명체의 설계도이며 그 발현도 유전자 안에 모두 새겨져 있다. 따라서 유전자에 변형이 생길 때만 후손에게 그 형질이 후손에게 이어져 진화의 재료가 된다.” 과연 그럴까. 이런 설명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생명 현상이 있다.

2005년 국내 개봉한 영화 ‘아일랜드’(감독 마이클베이)의 한 장면. 장기를 공여하는 용도로 비밀리에 생산된 복제인간들의 운명을 그렸다.

진화적 관점에서 노화를 연구하는 스티븐 어스태드에 따르면 지능지수의 40~80%, 수명의 20~30%만 유전물질에 따라 결정된다. 개체 형질 발현에 있어서 유전 요인뿐 아니라 환경 요인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인간의 경우 일란성 쌍둥이는 100% 같은 유전정보를 가지고 있지만 조사대상의 약 50%에서 제2형 당뇨병 같은 유전성 질환의 발병시기에 차이가 생겼다는 연구도 있다. 체세포 복제로 태어난 동물의 형질도 체세포를 제공한 개체와 차이가 난다. 복제 고양이의 성격이나 털 색깔 등은 체세포를 제공한 개체와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큰 차이가 나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후성유전학(epigenetics) 관점에서 획득형질의 유전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돌연변이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환경인자는 개체의 형질을 변화시킬 수 있으며, 형질 변화의 일부는 유전된다는 점이 입증됐다. 내분비 교란물질에 노출된 어미 쥐에서 태어난 자손은 면역질환 등의 발병빈도가 높다. 이런 질병은 적어도 제 4세대 자손에까지 전해질 수 있다. 환경변화에 의해 발생한 새로운 형질이 후손에게 전달되는 현상은 돌연변이 유전과 달리 DNA 염기서열의 변화 없이 이뤄진다. 지금까지는 주로 암억제 유전자가 돌연변이를 일으켜 암이 발생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돌연변이 없이 후성적으로 유전자 발현에 이상이 생기는 것만으로도 암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다행인 것은 후성적으로 일어난 변화는 적절한 약물을 통해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개발된 백혈병 치료제 아자사이티딘(5-azacytidine)은 후성적 변화를 되돌리는 약물이다.

유전자 구성이나 전달 과정에 손을 댈 수 없었던 시절에는 유전자 자체가 인간의 운명이었다. 하지만 이제 인류는 나쁜 유전자를 제거한 맞춤 아기(designer baby)까지 기대하게 됐다. 그러나 유전정보에 나타나지 않는 환경인자에 의한 변화가 문제다. 때문에 ‘맞춤형 유전 치료’가 손쉽게 성공하긴 어려울 거라는 전망도 있다. 환경 인자의 간섭으로 생기는 변화가 세대를 이어 전달된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부부가 자식을 갖기 전에 정신과 육체를 정갈히 하고 태교에 많은 공을 들였던 우리의 전통을 되돌아본다. 인간의 운명은 씨와 밭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성과 노력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점을 선조들은 꿰뚫고 있었다. 인간의 운명에는 유전자가 쥐어준 숙명을 뛰어넘을 땀방울이 필요하다.

장연규 연세대 생물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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