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20주년 특별기고] 광주여 천년의 빛으로 우뚝 서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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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푸른 5월이 광주의 중심을 지나고 있다. '점액질 한(恨)' 의 계절. 무등에는 철쭉이 핏빛으로 타오르고, 금남로와 망월동에는 아직 슬픈 '5월의 노래' 가 전율처럼 넘치고 있다.

역사의 엄숙성과 함께 온 2000년 광주의 5월은 여느 해보다 유난히 더 푸르기만하다. 푸르름 속에서 5.18 광주민주화운동 20주기를 맞은 광주 시민들은 엄숙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역사의 진정성 앞에 머리를 숙이고 있다.

광주항쟁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세력에 저항한 역사적 사건이며 광주 시민들의 피와 눈물로 획득한 눈부신 민주주의 꽃이다.

그러나 망월동 묘지 앞에 서면 자랑스러움보다 살아있음이 부끄러울 뿐이다. 5.18 민주제단에 찬란한 부활의 꽃을 피워냈지만 아직은 스스로가 떳떳하지 못하다.

그것은 굴절된 역사 속에서 잘못 비춰지고 인식된, 광주에 대한 왜곡된 시각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살아남은 자로서의 책임과 사명을 다시 한번 통감하고 있다.

그동안 진상규명, 희생자와 부상자에 대한 보상, 국가기념일 제정, 묘지 성역화 등 많은 부분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냈다.

거리에는 20주년 행사의 표어인 '천년의 빛(Millennium-Long Glow)' 플래카드가 영령들의 넋처럼 펄럭이고, 망월동에는 참배객들이 줄을 잇고, 각 대학과 문화예술단체에서는 추모 문화행사로 떠들썩하다.

그러나 20주년을 맞은 지금 5.18은 여전히 '광주만의 행사' '메아리 없는 외로운 진혼곡' 이 되고 있음이 안타깝다.

5.18은 역사적으로 완료된 특정지역의 비극적 사건이 아니고 억압과 독재에 항거해 민주주의를 앞당긴 민족적 거사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한다. 5.18은 끝난 것도 아니고, 특정지역의 푸념이나 한풀이는 더더욱 아니다.

정권교체가 이뤄졌다고 해서, DJ가 대통령이 됐다고 해서 '광주의 5월' 이 끝난 것은 아니다. 앞으로 해마다 광주의 5월은 치유되지 못한 아픔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내고 아름다운 공동체적 사랑의 연대를 위해서도 아직은 현재진행형이다. 그 점에서 광주정신의 보편화.전국화.세계화가 필요하다.

광주항쟁의 정신 속에서 민족구성원 모두가 공유해야 할 시대정신의 요체를 꿰뚫어보고 바르게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다.

민족적이고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5.18 정신을 온 국민이 함께 공유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공감대 확보와 국민적 차원의 정신 계승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제 5.18은 광주의 벽을 넘어서야만 한다. "아직도 5.18 한풀이냐" 는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한 5.18의 전국화는 요원하다.

5.18 정신을 전 국민이 공유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광주이즘' 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된다. 김대중 대통령 시대, 20주기를 맞은 지금 광주에서는 '광주가 달라져야 한다' 는 것이 새로운 화두가 되고 있다.

광주는 어떤 모습으로 변화해야하는가. 그것은 광주를 꿈과 희망, 관용과 겸허함의 이미지로 탈바꿈시키자는 것이다. 항쟁 20주년을 맞아 광주를 변화시키는 계기로 삼자는 것이다.

광주는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킨 여당의 모태다. 따라서 이제 광주는 그동안 역사 속에서 축적해온 민주역량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켜 좌절과 피해의식을 떨치고, 정치적 아집과 편견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한다.

특정 정당에 대한 맹신적인 집착으로부터 벗어날 때 광주는 비로소 역사 속에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정치로부터 자유로운 감정으로 먼저 자신감을 갖고 주체가 돼 지역감정의 벽을 허물고 화해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

지금 5월 정신은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접목시켜야한다는 또 다른 함의를 갖고 있다. 5.18의 새로운 지향점은 반목과 갈등, 오만과 편견의 극복과 새로운 공동체주의의 가치 모색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21세기의 광주정신은 평화로 가야한다. 20주년을 맞는 '5.18 광주선언' 은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평화의 깃발과 함께 지역갈등을 해소하고 분단을 뛰어넘어 통일로 가는 기폭제가 될 때 5.18은 비로소 민족과 함께 흐르는 도도한 역사의 물결이 될 것이다.

문순태 <소설가.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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