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장애인 올림픽 4일째] 허명숙, 42년 장애 설움 날렸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6면

▶ 18일 장애인올림픽 사격 여자 10m 공기소총에서 은메달을 딴 허명숙 선수가 시상식에서 메달을 들어보이고 있다. [한국장애인복지진흥회 제공]

'감격의 눈물'과 '아쉬움의 눈물'. 한 장소에서 서로 다른 의미를 지닌 두 가지의 눈물이 쏟아졌다.

18일 낮 12시40분(한국시간 오후 6시40분) 여자 10m 공기소총 결승전이 열린 그리스 아테네 남단 마르코폴로 사격장. 2, 3 사로(射路)에 나란히 앉았던 한국선수 중 한명은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고 한명은 고개를 숙였다.

손을 흔든 선수는 올림픽에서 메달을 처음 딴 독신녀 허명숙(48)선수, 고개를 떨군 사람은 '장애인 사격의 여왕' '미녀 총잡이' 로 불리면서 이 종목 올림픽 4연패에 도전했던 김임연(36.국민은행)선수였다. 허 선수는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은메달리스트로 등극했다. 반면 관중석 모퉁이에서 김 선수는 아쉬움의 눈물을 쏟아냈다.

허 선수는 "너무 감격스럽다"는 말만 하다 두 시간여 뒤 눈물의 의미를 차분히 설명했다.

"지난 세월이 너무 가슴 아파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습니다."

경북 울진에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어난 그는 여섯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하반신 마비가 됐다. 28세 때까지 부모 보호를 받았지만 가난과 장애 때문에 학교 문턱을 넘어보지 못했다. 부모님 신세를 더 이상 질 수 없다고 판단해 집을 나와 서울로 왔다. 휠체어도 그때 타기 시작했다. 영세공장 등을 전전하며 어렵게 생활하다 1992년 정립회관에서 사격에 눈을 떴다. 그의 실력을 눈여겨보던 이관춘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기량이 향상됐다.

96년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했지만 메달은 따지 못했다. 98년 방콕 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을 땄지만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선 다시 메달권 밖으로 밀려났다. 그는 "내가 실력이 없어서 그런 것인데 무슨 불만이 있겠느냐"고 겸손해 했다.

국제대회에 나갈 때 훈련비.참가비를 정부에서 대주지만 국내 대회 출전 비용 등은 스스로 책임져야 했다. 집에서 전자제품을 조립하고 사무실 전화를 대신 받아 주는 아르바이트 등을 해 한 달에 20만~30만원을 벌었다. 먹는 데를 제외하면 돈을 안 쓰고 아껴뒀다 봄이 되면 훈련비와 대회 참가비로 썼다. 하지만 돈이 떨어져 훈련을 중단할 때도 있었다. 소총도 낡디 낡은 것을 쓰다 최근에 삼성생명이 독일제 소총을 사줬다고 한다.

허 선수는 "마지막 한 발을 쏘는 순간 은메달임을 직감했다. 동메달 정도 기대했었다"면서 "순간 자식의 장애 때문에 한을 품고 5년 전 돌아가신 어머니 얼굴이 떠올랐다"고 했다.

반면 네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지체장애 3급 장애인이 된 김임연 선수는 "첫날 경기만 아니었어도…. 4연패에 대한 부담이 너무 컸다"고 했다.

김 선수는 12일 아테네에 도착한 뒤 훈련에서 만점에 가까운 기록을 보였다. 96년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시합 당일 급성위염으로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의료진의 권고를 뿌리치고 금메달 두 개와 동메달 한 개를 따낸 그였다. 하지만 이번 경기에선 총점 485.5점으로 6위에 머물렀다. "컨디션 관리에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라고 내내 아쉬워했다.

한편 두 선수는 20일 여자 50m 소총 3자세에서, 김 선수는 23일 혼성 50m 소총복사에서 다시 금메달에 도전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