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산 사린가스 원료 북한에 팔릴 뻔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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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최근 우리나라 화학업체에서 살상용 화학무기인 사린가스의 주원료로 쓰이는 시안화나트륨을 대량으로 구입하려다 미국 정보기관의 개입으로 무산된 사실이 뒤늦게 드러났다.

한나라당 박성범 의원은 17일 본지 기자에게 "국내 모 화학업체가 2003년 2월부터 지난 4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시안화나트륨 773t을 태국에 수출했는데 한달 뒤인 5월에 이 중 142.4t이 북한으로 재수출된다는 사실을 정부가 뒤늦게 알게 돼 태국 측에 선적 중지 요청을 했다"며 관련 자료를 공개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도 이 같은 사실을 지난 15일 국회에서 시인한 것으로 국회 속기록 검토 결과 드러났다.

박 의원이 반 장관을 상대로 한 질의 응답 내용과 외교부.산업자원부가 비공개로 국회에 보낸 근거 자료에 따르면 국내 D화학의 자회사인 O상사는 지난해 2월부터 지난 4월까지 네 차례에 걸쳐 태국의 화학제품 업체인 P사에 시안화나트륨 773t을 수출했다. 그런데 이 중 4월 2일 선적했던 142.4t의 최종 행방이 북한이라는 첩보가 5월 초 미국이 주도하는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의 감시체제에 적발됐다. 미국 측은 정보 라인을 통해 즉각 이 사실을 우리 국가정보원에 통보했다.

주 태국 한국대사관은 태국 정부의 협조를 얻어 시안화나트륨의 선적을 막았고, 태국 측 업체와 협의해 지난 6월 전량 국내로 회수했다. 8월 25일 태국을 방문한 반 장관은 수라키앗 태국 외무장관에게서 사건에 대한 유감의 뜻을 전달받고 이 같은 일의 재발을 막기 위해 양국이 협조할 것을 약속했다.

한편 이 같은 사실이 그동안 공개되지 않은 데 대해 정부 관계자는 "외부에 공개될 경우 북한을 자극할 우려가 있어 사건을 조용히 처리하려 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5월 독일 정부는 싱가포르로 수출되던 시안화나트륨 30t이 최종적으로 북한으로 건너간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운송을 중단시킨 사례도 있다.

◆ 시안화나트륨(sodium cyanide)=농약 제조.금속 도금 등에 널리 사용되는 물질로 우리의 주요 수출 품목이다. 독성이 강해 극소량이라도 먹으면 즉사하고 산(酸)으로 분해하면 무색의 액체.기체로 바뀌며 사린가스 등 화학무기로 전용될 수 있다. 국제적인 '다자 수출통제 체제'의 통제에 따라 수출입에 허가가 필요한 전략 물자다.

◆ 사린 가스=중추신경계에 영향을 미쳐 수분 내에 생명을 앗아가는 살상무기. 1995년 일본 종교단체인 옴진리교가 도쿄(東京) 지하철에서 살포, 수천명의 사상자를 냈다.

김정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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