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인 구상씨 무기수 '의아들'과 상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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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오늘도 어버이날에 맞춰/교도소에 있는 의아들로부터/편지가 왔다/…(중략)…/오늘도 나는 그 애의/글발을 읽고 되읽으되/그 애에게서가 아니라 내가/그 가슴에 꽃을 달 날이/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있기를/눈물로써 빌 뿐이다.' ( '어버이날에 온 편지' 중)

시인 구상(具常.81)씨에게 '그 가슴에 꽃을 달 날' 을 간절히 염원하게 한 무기수 의(義)아들 최재만(崔在萬.48)씨가 복역 20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나게 됐다.

具씨는 "아들 재만이가 석가탄신일을 앞둔 오는 10일 가석방된다는 사실을 며칠 전 박삼중(朴三中.자비 주지)스님으로부터 들었다" 며 "도와주신 삼중 스님과 배명인(裵命仁)전 법무장관께 감사드린다" 고 말했다.

具씨와 崔씨의 인연은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崔씨는 81년 발생한 경기도 시흥 농협 청계분소 살인사건 주범으로 지목돼 사형선고를 확정받아 서울구치소에 복역중이었다.

교화차 이곳을 방문했던 삼중 스님은 崔씨의 염주에 '나는 억울하다, 꼭 귀가하리라' 는 글귀가 새겨진 것을 본 뒤 "가혹행위에 못이겨 거짓자백을 하게 됐다" 는 崔씨의 사연을 듣게 됐다.

스님은 즉각 崔씨의 무죄를 주장하며 구명운동에 나섰고 具씨도 이에 동참했다.

具씨와 스님의 노력으로 崔씨는 88년 무기로 감형됐다.

감형 결정이 난 뒤 崔씨가 具씨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아버지로 모시고 싶다" 는 것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맺어진 인연을 소중히 여긴 具씨는 이를 부자(父子)의 연으로 이어가기로 했다.

지난 12년간 외출할 때마다 아파트 입구의 편지함을 열어보며 崔씨의 소식을 기다리던 具씨는 이제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된다.

"말만 애비였지 별로 해준 게 없다. 오히려 재만이가 아들 노릇을 톡톡히 했다" 는 백발의 시인은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애비 노릇을 해보겠다" 며 환하게 웃었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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