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석학칼럼] "IMF 유리알 운영 필요"-사카키바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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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난 2일 국제통화기금(IMF)신임총재에 독일의 호르스트 쾰러 전 유럽부흥 개발은행 총재가 취임했다.

이제까지 유럽이 단일후보를 옹립하면 미국이 이를 추인하는 형태를 취해 온 점을 고려한다면 이번 결과는 극히 자연스럽다.

내가 총재후보로 입후보했던 것은 반드시 IMF 총재가 되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현 시점에서 아시아 국가 및 개발도상국들이 IMF개혁에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데 그 의도가 있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이같은 나의 목적은 어느정도 이뤄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는 한국이나 일본이 중심이 돼 다른 아시아 국가들과 개도국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면서 강력하게 IMF개혁을 추진해 나갈 필요가 있다.

IMF의 운영과 정책결정이 유럽 및 미국의 암묵적이고도 불투명한 합의로 이뤄지던 시대는 이미 끝났으며 또한 우리들은 보다 투명하고 민주적인 IMF운영을 위해 노력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IMF는 그 프로그램을 작성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해당국가의 정책운영이 얼마나 투명하고 민주적인가를 따진다.

그러나 정작 그것을 요구하는 IMF의 운영방식은 투명하지도, 민주적이지도 못하다.

종전부터 만장일치 방식으로 유럽과 미국의 밀약을 추인해 온 IMF총재의 선출방식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재 IMF총재는 IMF이사회에서 24개의 선거그룹을 토대로 해서 24명의 이사가 선출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분명히 바뀌어야 한다.

이번 경우도 한국은 호주의 이사가 대표로 있는 선거그룹에 속해 있었는데 이 제도 때문에 정작 한국은 나를 지지했지만 표결 결과로는 나타날 수 없었다.

IMF이사회가 선거를 책임지는 형태는 유지돼야 한다고 하더라도 투표는 개별국가 단위로 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이사의 역할은 단지 그 결과를 이사회에 보고하는 것만으로 끝나야 한다.

또한 24개의 선거그룹 및 각국에 할당되는 쿼터도 현실을 반영하는 방향으로 개정해야 할 것이다.

현재 유럽은 24개의 선거그룹 중 8개의 이사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동남아시아는 이사 3명, 남아시아는 1명에 불과하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IMF가 설립될 당시 세계경제상황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

쿼터도 한국.싱가포르.태국.말레이시아.일본 등은 본래 돌아가야 할 쿼터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수준이다.

또한 중국.러시아.사우디아라비아 등이 단독으로 선거그룹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최소한 한국.호주 등도 단독으로 선거그룹을 구성해야 한다.

어쨌든 24개 선거그룹의 운영방식과 쿼터에 대해 곧바로 재검토 작업을 벌여야 할 필요가 있다.

하지만 IMF개혁은 쿼터의 개정, 선거그룹의 재구성만으로 끝날 문제는 아니다.

IMF의 개혁을 통해 감시.감독과 프로그램의 중점을 국제자금의 이동에 대한 대응에 둬야 할 것이다.

그리고 IMF가 구조조정에 관여하는 것은 위기해결에 직접 관계가 있을 경우로 한정해야 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국제자본의 이동 때문에 한국 등 아시아에 유동성 위기가 닥쳐왔던 사실을 감안한다면(한국의 위기는 유동성 위기의 전형적인 경우였다)IMF가 어떤 형태로든 최종 대부자로서의 역할을 해내야 할 것이다.

만약 IMF나 서방선진 7개국(G7)이 1997년 9월~11월에 최종 대부자로서의 역할을 살려 외국계 은행의 대출상환 만기연장 등을 조건으로 유동성을 한국에 제공했더라면 아마 한국은 금융위기를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최종 대부자로서의 역할문제와 관련해 모럴 해저드 이론을 앞세우며 반대하는 이코노미스트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적절치 못하다.

국내경제에서 중앙은행이 최종 대부자로서 갖는 의미를 인정한다고 했을 때 국제경제가 글로벌화하고 국제자본의 이동이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국제적 최종 대부자의 기능을 인정하자는 데 반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IMF개혁에서 또하나 우리들이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지금껏 IMF가 매우 교조적이었다는 것이다.

즉 개별 국가들의 특수한 상황을 충분히 배려하지 못했다.

이는 IMF의 교의(敎義)가 극히 고전적인 매너리즘에 치우쳐 왔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폴락 조사국장의 시대 때부터 조사국장이나 조사국의 주요 인맥은 시카고학파에 독점돼 왔던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세계경제 구조가 정보기술(IT)혁명과 세계화에 의해 엄청나게 변화하고 있는 현 시대에 이는 분명히 시대착오적인 교의임이 틀림없다.

거시경제학 이론을 전면 부정하고 싶은 생각은 털끝 하나 없지만 조금 더 개별국가들의 특수상황을 배려해나가는 일이 중요하다.

정리〓김현기 기자

<사카키바라 약력>

1941년 가나가와(神奈川)현 출생

도쿄대학 경제학부 졸업, 미 미시간대학 경제학 박사

IMF에서 4년간 근무 후 대장성 관방심의관, 국제금융국 차장, 재정금융연구소장, 국제금융국장, 재무관등을 역임하며 '미스터 엔' 으로 불림

현재 게이오(慶應)대학 부설 글로벌 시큐어리티 리서치센터 소장

주요저서 : '시장원리주의의 종언' '진보주의와의 결별' '신세기에의 구조개혁'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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