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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태' 여전한 국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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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정애 정치부 기자

16일 오후 10시10분 국회 정무위 회의장. 한나라당 의원들이 위원장석을 점거한 가운데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들어왔다.

▶열린우리당 문학진 의원=오늘의 의사일정을 처리하자.▶한나라당 남경필 의원=소집 자체가 불법이다. (다수의)힘으로 할 생각을 마라.▶열린우리당 전병헌 의원=옛날 버릇 못 버렸다.▶남 의원=국회에서 절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느냐. 무시하는 게 날치기다.

곧 주변에선 "날치기다" "무슨 날치기냐"는 소란이 벌어졌다. 출자총액제한제도 유지를 내용으로 한 공정거래법 개정안 처리 여부를 둘러싸고서다. 이런 장면은 11월 중순 국회 본회의에서 법안을 처리한다는 합의가 나온 17일 오후 6시쯤까지 지루하게 이어졌다.

과거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다. 지난해 12월 24일 정개특위에서 한나라당.민주당.자민련 등 야 3당이 지금의 열린우리당 역할을, 열린우리당이 소수당 역할을 했다. 그때 열린우리당은 "의정사에 남을 파렴치한 행위"라고 비난했다.

새 인물이 어느 때보다 많이 들어온 17대 국회에 대한 기대는 컸다. 하지만 넉달이 지난 지금 '구태'란 꼬리표가 붙은 장면이 재연됐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게 뭐냐는 비판이 나온다.

양측은 "폭력으로 국회 운영을 방해한 것은 구태정치의 전형"(열린우리당 천정배 원내대표), "정쟁을 없애고 최대한 대화와 타협을 하자고 하더니…"(한나라당 김덕룡 원내대표)라고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재상영물'을 트는 속셈은 따로 있다.

열린우리당은 공정거래법안 처리를 늦추면 과거사규명법안.언론개혁법안 등의 처리에 지장이 생길 것으로 봤다. 한나라당이 강력히 반대하는 법안들을 한꺼번에 통과시키려 할 경우 무리가 따를 것인 만큼 공정거래법안만큼은 먼저 해치우려고 했던 것이다. 한나라당은 "한번 밀리면 계속 밀린다"는 판단에서 결사적이었다.

이런 모습에 대해 현장의 의원들은 스스로 부끄러워했다. 한 열린우리당 의원은 "딸에게 보이기 창피하다"고 했고, 한나라당의 한 의원은 "이러지 않으려고 국회에 왔는데…"라고 했다. 개원 당시 초심을 곱씹을 때다.

고정애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