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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펀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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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미국 은행 중엔 공식 명칭에 '은행(bank)'이란 단어가 들어있지 않은 곳이 적지 않다. 시티은행(Citibank)이나 BOA(Bank of America)처럼 은행임을 공식 명칭으로 밝히는 곳도 있지만, 웰스 파고(Wells Fargo & Company)나 J P 모건 체이스(JP Morgan Chase & Co.) 등의 이름은 일반 회사처럼 보인다. 반면 우리나라 은행들의 이름은 한결같이 '○○은행'이다. 미국 등 외국에선 은행업을 하는 회사가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나중에 은행업에 대한 법률과 규제가 등장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은행법이 먼저 만들어진 뒤 근대적 의미의 은행이 자리 잡게 된 역사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

이런 차이 때문인지 미국의 금융제도가 국내에 들어올 때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 지난주 우여곡절 끝에 관련 법률이 국회를 통과한 사모(私募)투자펀드(Private Equity Fund.PEF)가 좋은 예다. PEF는 '사모(Private)'란 이름처럼 소수의 사람에게서 돈을 모아 투자하는 펀드다. 당초 미국에서 PEF가 생긴 것은 감독 당국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감독 당국은 통상 100명 이상의 불특정 다수로부터 돈을 모으는 '공모(公募.Public)'에 대해서만 까다롭게 규제한다. 따라서 소수의 돈을 모으는 미국의 PEF는 감독 당국에 등록할 필요도 없고, 투자 대상에 대해서도 아무런 제한이 없다. 제일은행의 대주주인 뉴브리지 캐피털, 한미은행의 옛 대주주 칼라일 등이 잘 알려진 PEF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새로 도입되는 PEF는 미국의 PEF와 전혀 다르다. 한국의 PEF는 감독 당국에 등록해야 하고 투자 대상도 제한된다. 특히 은행 주식을 4% 이상 살 때는 더욱 엄격한 감시를 받게 된다. 미국의 PEF와 같은 점은 소수의 투자자에게서 돈을 모은다는 정도에 불과하다. 귤이 물을 건너면서 탱자로 변한 꼴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우리나라 금융감독체계가 '포지티브(positive)' 시스템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금융회사가 법률과 규정에 정해진 일만 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금융회사가 해서는 안 될 일만 정하는 미국의 '네거티브(negative)' 시스템과 정반대다. 우리 나름의 특수한 사정이 없지 않지만, 동북아 금융 허브를 주창한다면 귤이 탱자로 변하는 근본 원인부터 따져봐야 한다.

이세정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