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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궁녀 숫자놓고 학술대회서 공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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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백제멸망과 함께 낙화암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알려진 삼천궁녀(三千宮女)는 실제로 '3천명' 이었을까.

지난달 28일 부여 삼정유스호스텔에서 열린 제3회 삼천궁녀제 학술대회에선 이 문제를 둘러싸고 전문가들 사이에 열띤 공방이 벌어졌다.

이날 발제자로 나선 대전 한남대박물관 이필영(李弼泳)관장은 "조선 중종 때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의 부여현조(扶餘縣條)에는 '백제군이 당나라군에게 패하자 궁녀들이 쏟아져 나와 낙화암에서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졌다' 고 기록돼 있지만 '삼천' 이란 표현은 몸을 던진 궁녀들의 숫자가 많다는 것을 과장한 것으로 보인다" 고 주장했다.

공주대 구중회(具重會.국어교육과)교수도 "삼천은 불교 용어인 '삼천대계(三千大界)' 등에서 따 온 종교적 표현일 것 "이라며 "3천궁녀에는 후궁(後宮)뿐 아니라 궁중의 의식주와 관련된 여자들이 다수 포함됐을 가능성이 크다" 고 지적했다.

공주민속극박물관 심우성(沈雨晟)관장 역시 "삼천 궁녀는 왕실과 관계 있는 여자 중 투신한 전체 숫자를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고 주장했다.

'삼천' 이라는 숫자가 역사상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조선 명종 때 학자인 입암(立巖) 민재인(閔齋仁)이 쓴 '백마강부(白馬江賦)' .입암은 여기서 백제멸망 직전 의자왕의 방탕한 생활과 관련, '삼천(궁녀)이 구름처럼 많다(三千其如雲)' 라는 표현을 썼다.

이어 숙종 때의 학자인 이사명(李師命)은 비운의 백제 역사를 노래한 '산유화 가음(山有花歌吟)' 에서 "삼천(三千)의 얇은 비단(궁녀)은 번화(繁華)함을 오로지 했네" 라고 노래했다.

부여〓최준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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