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자구·정부지원 '기싸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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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현대그룹은 현대투신 부실해소 방안으로 대두된 오너 일가의 사재 출연 문제와 관련, 정부 관계자와 접촉하면서 진의를 파악하는 한편 수위 조절에 나섰다.

현대는 구조조정본부를 중심으로 여러가지 상황별 자구(自救) 시나리오를 놓고 여론 추이와 정부의 압박 강도에 따라 대응책을 모색하면서 주식시장이 열리지 않은 연휴를 활용한 '시간 벌기' 에 나서는 모습이다.

정몽헌(鄭夢憲) 회장은 지난달 29일 오전 서울 계동 현대그룹 본사에 출근해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는 측근에게 출장을 다녀오겠다며 회사를 나갔으며 30일에는 출근하지 않았다.

鄭회장은 28일 밤 늦게 귀가하면서 사재 출연 여부를 묻는 기자에게 "할 말이 없다" 고 대답했다.

현대 관계자는 "鄭회장은 3일 현대건설이 공사를 맡은 수원 컨벤션센터 기공식에 참석할 것" 이라며 "사재 출연 문제 등으로 곤혹스러워 외부와 접촉을 피하고 있다" 고 말했다.

현대의 다른 관계자는 "사재를 출연하려 해도 부동산이나 비상장사의 주식 등 내놓을 만한 게 별로 없다" 고 말했다.

김재수 현대 구조조정본부장은 지난달 28일 이용근(李容根) 금융감독위원장을 만난 데 이어 정부쪽 인사와 접촉하면서 그룹 차원의 추가적인 자구책을 검토하고 있다.

현대 관계자는 "정부에 공적자금이 아닌 장기저리 자금을 융자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 이라면서 "우리도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 만한 대안을 찾고 있는데 여의치 않다" 고 말했다.

현대그룹은 연휴기간에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한 뒤 이르면 2일 추가적인 자구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한편 李금감위원장은 지난달 28일 기자와 만나 "현대투신증권이 이날 발표한 경영정상화 계획은 시장의 기대에 크게 미흡하다" 며 "현대의 자구 노력에는 경영과 지배구조 개선은 물론 대주주나 계열사의 현대투신 부실 해소 참여 등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그는 "총수 일가의 사재 출연을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는 없다" 면서도 "현대측이 시장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알아서)지혜롭게 해결해야 할 것" 이라고 밝혔다.

李위원장은 "현대에 대한 정부 지원은 유동성 위기 조짐이 있을 때만 가능하며, 재무구조나 부실 개선을 위해 자금 지원이 이뤄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 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현대 관계자는 "현대투신의 부실은 정부의 권유로 한남투신을 인수한 데다 대우 채권의 손실 분담에 따라 생겼기 때문에 삼성자동차 처리 때와 같이 전적으로 오너 책임에 따른 사재 출연은 곤란하다" 고 말했다.

그러나 또 다른 현대 관계자는 "계열사 주가가 하락하면서 그룹 전체 문제로 확대된 현대투신의 부실에 대주주인 현대전자.현대증권과 오너 일가가 어떤 형태로든 책임져야 한다는 의견도 대두하고 있다" 고 말했다.

김시래.이정재.서익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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