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풍류탑골 (14)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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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14.진짜 애주가

한동안 소설가 현기영선생은 본인보다 나이가 15년 이상 차이가 나는 후배들에게도 망년우(忘年友)라며 서로를 편히 부르게 했다.

그럴 때면 고형렬 시인이나 이재무 시인은 거침 없이 "어이 노형" 하고 불렀다가 한박자 쉬고 '선생' 하였다. 아무래도 뒤가 캥겼던 것 같다.

선생이 태어난 고향 동네의 이름인 '노형리'에서 리자를 뺀 것이 그 호의 내력이었는데 막상 그렇게 부르려하니 선생의 나이가 너무 많았던 것이리라.

"아니 노형 선생, 이번에도 그 줄뻔댁한테 또 당했지요?"

"말도 마, 내가 말야 10년을 넘게 공을 들이는데도 줄듯줄듯 안 준단 말야. "

"점잖게 허니까 그렇죠. 힘을 한번 쓰셔야지."

"야 그 줄뻔댁이 힘가지고 해볼 위인이냐? 그럼 진작 주었게. "

탑골이 아닌 단골집 여주인 이야기였는데 그들 모두가 다 현선생이 소기의 성과를 못거두고 있음을 놀리는 것이었고 그때마다 웃음이 터져나왔다.

현선생이 술을 사랑하던 일화는 많다. 그중 재미난 것은 소주를 뜨거운 물에 부어 마신다는 이야기다.

한번은 현선생이 지독한 감기에 걸렸는데 강형철 시인의 청에 못이겨 술집에 와서는 절대 술 못마신다고 했다가 앞에서 술마시는 것을 보고는 물을 뜨겁게 끓여오라고 주문한 뒤 그 물에 소주를 부어 그야말로 한약 먹듯이 먹더라는 것이다.

그쯤이면 주선 아닐까? 나는 가끔 탑골 시절에 만났던 그런 문인들의 안부를 신문을 통해 알게 되는데 현선생의 소설 '지상에 숟가락 하나' 도 그렇게 해서 볼 수 있었다.

그 책은 마치 옛날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생각이 들만큼 구수하고 재미있었다. 그 책을 읽으며 현선생이 왜 그렇게도 제주도 이야기만 쓰는지도 알았고, 이야기를 들을 때 한쪽 귀에 손을 대며 듣는지도 알았다.

어려서 겪은 열병 덕에 한쪽 귀의 청력을 잃었다는 것이다. 나는 서울 토박이여서 그런 고향 이야기를 들으면 신기하고 재미있다.

더구나 70년대 말 이래 줄곧 제주도 이야기를 한 것에는 커다란 역사적 비극이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는 것을 현선생의 어린 시절 구체적인 이야기를 통해 들으니 더더욱 실감이 났다. 책의 뒷부분에는 다음의 말이 있어 인상적이었다.

"지금의 나에게는 그 동안의 서울생활이란 부질없이 허비해 버린 세월처럼 여겨진다. 저 바다 앞에 서면, 궁극적으로는 내가 실패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준다."

나는 현선생이 서울 생활이 모두 실패라고 말한데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 그 동안 4.3에 대한 진상 규명 특별법이 통과되었고 일반 사람들은 제주도 4. 3이 단순한 폭동이 아니고 우리의 현대사에 드리워진 근원적 모순의 발로라는 생각도 많이 갖게 되었는데 그런 공은 바로 현선생이 선구적으로 일궈낸 것이 아닌가!

도리어 그런 말을 보면서 앞으로도 현선생은 또 제주도에 얽힌 이야기를 쓰게 되겠구나라는 생각부터 갖는다.

제주도는 선생에게 세계의 중심인 것이다. 옛날 어떤 사람이 떠나온 고향을 못잊어 돌아보았다가 소금기둥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현선생이야말로 고향 제주도를, 아니 그 제주도의 비극과 진실을 불러내기 위해 소금기둥을 자청한 사람이 아닐까.

"우리 어멍 바다로 나가 추운 물살에 몸을 담글제" "으쓰 으쓰! 이어도 산하, 으쓰 으쓰"

"전복이랑 해삼이랑 모두들 모여" "으쓰 으쓰 이어도 산하, 으쓰 으쓰"

그렇게 매기고 받으며 늘 청년처럼 술을 마시던 현 선생, 후렴으로 따라 부르다가 모여 있는 술꾼들이 모두 하나가 되던, 힘든 그 고통들을 정겹게 넘어가던 모습은 내게 별처럼 아름답다.

한복희<전 탑골주점 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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