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닐라 8차선 도로가 마비됐다 … 한류 때문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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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한국-필리핀 수교 60년 기념 콘서트가 지난달 27일 필리핀 국립극장에서 열렸다. 한국 그룹 샤이니를 보려는 팬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다. 주변 8차선 도로가 마비될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필리핀 한인회 제공]

#장면 1. 필리핀의 국민가수로 불리며 1970~80년대를 풍미했던 프레디 아귈라. 그는 28개 국어로 번안된 800만 장의 앨범을 팔면서 최고의 팝 아티스트로 추앙 받았다. 전설의 히트곡 ‘아낙’은 한국에서도 ‘아들아’란 곡으로 번안돼 음반 시장을 강타했다. 지난달 27일 밤 마닐라 시내의 한 뮤직 바에서 아귈라와 마주쳤다. 그는 스무 평 남짓한 그 바의 운영자라고 했다.“주말이면 가끔 카페 무대에도 오른다. 중·장년 아시아 관광객이 많이 오는 편”이라고 말했다. 이날도 그는 기타를 둘러메고 무대에 섰다. 입장료는 250 페소(약 6000원). 두 시간 가까이 공연이 이어졌지만, 관객은 스무 명을 채 못 넘겼다.

#장면 2. 같은 날 오후 마닐라 중심가에 위치한 필리핀 국립극장. 주변 8차선 도로가 마비됐다. ‘한국-필리핀 수교 60주년 기념 콘서트’에 몰린 인파 때문이다. 아리랑TV와 필리핀 NBN 방송사가 공동 중계한 행사(5일 오후 4시 방송)는 한국 아이돌 그룹 ‘샤이니’의 등장으로 절정에 달했다. 인터넷으로 공개 추첨한 티켓은 서버 다운을 거듭하며 이틀 만에 동이 났다. 이른 새벽부터 “표를 얻을 수 없느냐”며 아우성치는 팬들이 극장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SHINEE’라고 새겨진 하늘색 티셔츠를 입은 100여 명의 현지 팬클럽은 풍선을 흔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객석에선 “안녕하세요” “오빠” 등 어눌한 한국어 환호성이 들렸다.

필리핀이 한국 대중문화에 열광하고 있다. 필리핀 언론 매체에서도 심심찮게 ‘hallyu(한류)’란 말이 흘러나온다. ‘천국의 계단’ 등 인기 한국 드라마를 리메이크하는 게 요즘 필리핀 방송가의 주된 트렌드다. 필리핀에서 활동하다 한국으로 무대를 옮긴 산다라 박(2NE1 멤버)을 시작으로 한국 아이돌 그룹의 인기도 치솟았다. 현재 원더걸스(1위)·슈퍼주니어(3위)·샤이니(9위)는 필리핀 앨범차트 10위권을 장악했다.

특히 올해는 한국과 필리핀이 수교한지 60년째 되는 해다. 두 나라의 60년사는 기막힌 문화의 역전극을 펼쳐내고 있다. 필리핀 국민가수 아귈라가 물러난 자리를 한국 아이돌 그룹 ‘샤이니’가 메우고 있는 풍경은 그 역전의 역사를 에둘러 보여준다.

60년 전만 해도 필리핀은 한국에 원조를 하던 부국(富國)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에 7400여 명의 필리핀 군인들이 참전했다. 70년대엔 필리핀 정부가 한국의 똘똘한 학생들을 데려다 공부를 시켰다. 당시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경제력 2위를 달리던 필리핀은 아귈라 같은 대형 가수를 탄생시키며 문화적 파워도 과시했다.

하지만 60년 세월은 양국의 ‘문화 파워’를 뒤바꾸어 놓았다. 27일 필리핀 국립극장 주변으로 몰려든 10대 팬들 가운데는 한국 음악을 따라 부르기 위해 한국어 공부에 열중하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곳곳에서 ‘필리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샤이니 짱’과 같은 한글 피켓이 눈에 띄었다.

‘원더걸스’팬이라는 여고생 베르나데테(18)는 “코리안 팝이 너무 좋아서 대학 진로를 한국어과로 정했다”고 말했다. 실제 이날 공연에서도 팬들이 한국어 가사로 노래를 따라 부르는 광경이 반복해서 펼쳐졌다. ‘샤이니’ 멤버 종현은 “처음 필리핀 무대에 올랐는데 관객들이 우리말로 노래를 따라 부르고 춤까지 똑같이 춰서 놀랐다”고 말했다.

필리핀을 강타한 한류의 중심엔 영어로 제작된 우리 방송의 역할이 컸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필리핀에선 언어 장벽이 없는 영어 방송을 통해 우리 문화가 급속히 확산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현재 마닐라에서 국제방송인 아리랑TV를 시청하는 가구 수가 50만에 이른다. 최근엔 ‘아리랑TV 팬클럽’도 생겨났다. 특정 한류 스타가 아닌 방송 채널에 팬클럽이 생긴 건 해외에선 처음이다. 지난해 4월 출범해 비정기적으로 한국 드라마 등을 감상·분석하는 모임이다. 팬클럽 회장인 제시카(44)는 “필리핀도 한국과 비슷한 가족 중심의 문화여서 한국 대중문화가 낯설지 않고 매력적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마닐라=정강현 기자

“한국 드라마·음악 열풍에 한국어학원도 성황”
필리핀 방송 인기 MC 한국인 그레이스 리

필리핀 지상파 방송사 GMA TV 등에서 MC로 활약 중인 그레이스 리(27·사진·한국명 이경희). 그는 ‘한류’열풍이 불어닥친 필리핀 현지에서 또 다른 한류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인기 방송인이다.

그레이스는 열 살 되던 해에 부모님을 따라 필리핀으로 이민 왔다. 우리말과 영어는 물론 현지어(타갈로그어)까지 완벽하게 구사한다. 현재 타칼로그어를 주로 사용하는 GMA TV와 영어 방송인 QTV·GMA 라디오 등에서 메인 MC로 뛰고 있다.

그는 17년 필리핀 생활을 거치면서 ‘한류’의 힘을 실감했다고 했다. “맨 처음 마닐라에 왔던 1992년만 해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팽배했다”고 전했다. 때로 추한 모습을 보이곤 했던 한국인 관광객 때문이었다.

그러나 ‘대장금’ 등 한국 드라마가 들어오면서 조금씩 한국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다고 한다. “최근에 한국 드라마와 음악 열풍이 불면서 마닐라 시내에 한국어 학원이 성황을 이룰 정도입니다.”

방송을 진행하면서도 한국인이란 사실이 강점으로 작용했다. 자신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팬층도 더 두터워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전화를 걸어와 한국어로 인사를 건네는 팬들도 눈에 띄게 늘었다고 한다.

그레이스는 “필리핀 방송사의 제안으로 한류를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방송을 준비 중”이라고 소개했다. 한류 스타를 직접 만나고, 한국 대중음악을 알리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최근에는 필리핀판 한국 드라마에 출연해달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필리핀에서 일하는 방송인으로서 한국인이기 때문에 주목을 더 받은 측면도 있어요. 한국 문화를 제대로 알리기 위해 더 노력해야겠죠.”

마닐라 글·사진=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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