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창호 감독이 이탈리아 영화제서 본 느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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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지난 8일부터 16일까지 이탈리아 북부도시 우디네에서 아시아 영화제가 열렸다.

남북한과 일본.홍콩.중국.태국 등에서 출품한 화제작 55편이 상영됐다.

이 영화제에 '정'(精)을 출품, 최우수 관객상을 수상한 배창호 감독이 모처럼 접한 북한영화엠 대한 감상을 적었다.

아시아지역에서 가장 많은 편수를 출품한 나라는 한국이었다.

필자의 최신작 '정' (情)을 비롯, '쉬리' '텔미섬딩' '주유소습격사건' '자귀모' 등 11편의 흥행대작이 초대되었다.

북한도 지난 10여년간 제작된 작품 중에서 대표작이라 할 만한 영화 8편을 출품했다.

이처럼 많은 편수의 남북한 영화가 해외 영화제에 나란히 참가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유럽의 매스컴과 영화관계자들도 좀처럼 보기 어려운 북한영화에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나 또한 북한 영화를 5편 보았다. 필자로서는 북한영화 감상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92년 일본에서 열렸던 '남북조선영화제' 에서 본 '내고향' 이란 영화는 분단 이후 첫 작품(1948)으로 매우 격조 높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번 우디네영화제에서 북한영화 큐레이터로 활약한 독일인 요하네스 숀헤르는 "북한 영화는 크게 항일투쟁.한국전쟁.통일의 염원.주체사상을 다룬 영화로 구분할 수 있다" 고 설명했다.

북한 영화 중에서 필자의 눈길을 끈 작품은 '마지막 임무' (1988년)라는 합작영화였다.

60년대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로 이름을 떨쳤던 이탈리아 감독과 미국, 이탈리아의 B급 배우들이 북한에서 올로케이션으로 찍은 것으로, 미국과 유럽의 B급 영화시장을 겨냥해 영어대사로 만든 스파이영화였다.

평양거리, 항구, 그리고 지정문화재급인 듯한 고색창연한 사찰 등을 배경으로 국적을 알 수 없는 스파이들이 총격전을 벌이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마치 70년대 대만.홍콩 무협영화의 주요 무대로 남한의 유명 사찰이나 고적지를 제공한 듯한 인상을 줬다.

이번에 북한영화를 보면서 놀란 것은 최신작일수록 선동성이 강하다는 사실이다.

1987년작 '도라지꽃' 의 테마는 '도시로 가지 말고 고향을 지켜라' 이며, 97년작 '해운동의 두 가정' 은 '게으름을 이기고 영웅이 되자' 라고 외친다.

최신작인 99년의 '추억 속에 영원하리' 는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을 스스로 인정하듯 군인과 민간인이 힘을 합해 식량증산을 꾀하자는 내용이었다.

강냉이와 죽을 도시락으로 싸온 부녀자들이 뒤섞여 음식을 나눠 먹는 장면, 홍수를 막기 위해 군인들과 농민들이 함께 필사적으로 인간방파제를 만드는 장면 등은 가슴 아픈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자본주의 영화의 독이 지나친 쾌락성이라면 북한 영화의 독은 지나친 선동성이란 생각이 들었다.

기술적인 면에서는 많이 세련된 모습을 보였다.

홍콩의 무술영화를 표방한 86년작 '홍길동' 은 당시로서는 특수효과가 수준급인 흥행영화였으며 '추억 속에 영원하리' 는 촬영.현상 등이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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