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낱장으로 분해된 국보, 아무도 실체는 모른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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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상주 훈민정음'을 보유하고 있는 배익기씨가 지난 19일 본지에 공개한 훈민정음 해례본 중 한 장. 배씨는 책의 나머지 부분은 공개를 거부했다. 상주=임현욱 기자

“국보 70호인 훈민정음과 동일한 판본이 경북 상주에서 발견됐습니다.”

사건은 앵커 멘트와 함께 시작됐다. 지난해 7월 31일 MBC뉴스는 또 하나의 훈민정음이 발견됐음을 알렸다. 경북 상주시 낙동면에 사는 배익기(46·한문학자)씨가 집을 수리하다 우연히 훈민정음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훈민정음이 방송에 공개된 지 10일 만에 또 다른 주인이 나타났다. 골동품상 조용훈(65)씨가 “배씨가 찾아냈다는 훈민정음은 우리 집에서 훔쳐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국보급 문화재를 놓고 두 사람은 소유권 다툼을 시작했다. 경찰 수사와 민사소송이 1년 넘게 이어졌다. 정부는 뒷짐만 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훈민정음은 낱장으로 분리됐고, 온전한 상태에 있는지는 배씨 외에 아무도 알지 못한다. 훈민정음을 둘러싼 싸움의 전말을 중앙 SUNDAY가 추적했다.

배씨 “책 보존 여부, 확인해줄 수 없다”

기자는 19일 현재 훈민정음을 보유하고 있는 상주의 배익기씨 집을 찾았다. 흙과 돌로 지어진 전형적인 옛집이었다. 배씨의 집 대문 옆에는 파란색과 붉은색 글씨로 ‘본 가옥은 국보 70호와 동일한 물건이 발견된 곳으로 무단 침입 시 고발하겠음’이라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마당에는 수백 권의 고서적과 수백 점의 골동품이 쌓여 있었다. 배씨는 10여 년 전부터 모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마당 한쪽을 가리키며 “저기에 있는 책들을 정리하다 훈민정음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배씨는 자신의 방으로 기자를 안내하고 잠시 기다려 달라고 했다. 10여 분 만에 배씨가 낡은 고서적 세 권을 커다란 한지로 받쳐들고 나타났다. 그러곤 책 사이에서 조심스레 종이 한 장을 꺼내며 말했다.

“훈민정음입니다.”
노랗게 바랜 한 장의 훈민정음이 하얀 한지 위에서 두드러져 보였다. 그가 보여준 훈민정음은 낱장으로 분리한 것 중 한 장이었다. 글자들은 마치 얼마 전 인쇄한 듯 깨끗하고 명확했다. 하지만 아랫부분은 진한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책의 나머지는 온전한지 걱정됐다.

“책의 나머지는 잘 보존되고 있습니까?”(기자)
“그 점에 대해선 어떤 대답도, 확인도 해 줄 수 없어요.”(배씨)
“왜지요?”(기자)
“저쪽(훈민정음을 도둑맞았다 주장하는 조용훈 씨)에서 나를 압박하려고 훼손이 우려된다는 말을 퍼뜨리는데, 계략에 말려들지 않겠습니다.”(배씨)
“당신의 것이 확실하다면 왜 떳떳하게 공개하지 못하지요?”(기자)
“문화재를 발견하면 돈을 노리는 사람들이 발견자를 가만 놔두지 않아요. 지금 나는 아무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공개하지 않는 겁니다.”(배씨)
결국 소유권 다툼의 와중에 낱장으로 분리된 책의 안위는 배씨만 아는 비밀이 돼 버렸다.

“국과수서 지문감정해야” 압박

다음 날인 20일 오후 2시 상주 지방법원 2호 법정. 훈민정음 소유권을 둘러싼 민사재판의 3차 변론이 시작됐다. 국보급 문화재를 둘러싼 재판이었다. 그러나 훈민정음의 존재 여부 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양측은 지루한 공방만 되풀이하고 있었다.이날 양측은 훈민정음에 남아 있을지 모를 지문을 두고 신경전을 벌였다. 책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하는 조씨 측 변호사는 “책에 조용훈씨의 지문이 남아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국립과학수사 연구소의 감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배씨는 “이 사안은 이미 검찰 조사에서 필요 없다고 넘어간 부분인데 왜 지금 와서 다시 요청하느냐”고 항의했다.결국 재판부는 지문 감정은 필요 없다는 쪽으로 결론 내렸다. 지금까지 확보한 재판 자료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지문 감정은 불필요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이날 재판은 10여 분간 서로의 주장만 확인했을 뿐 별다른 진전 없이 다음 변론일자를 정하고 끝났다. 소유권을 가리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원고도 피고도 심지어 재판부도 책이 훼손되지 않고 잘 보관되고 있는지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민사소송 이전에는 경찰수사도 진행됐다. 상주시내에서 골동품 가게를 운영하는 조용훈씨가 방송을 보고 자신의 가게에 있던 것을 배익기씨가 훔쳐갔다며 경찰에 고소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상에 공개된 지 10일 만에 자취를 감추게 된다.조씨는 7월 26일 배씨가 자신의 가게에 와서 30만원어치의 고서적 50여 권을 사가면서 가게에 있던 훈민정음을 몰래 가져갔다고 주장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책으로, 이 책이 상당한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훈민정음인지 모른 채 보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자 배씨는 조씨를 무고죄로 맞고소했다.

이렇게 시작된 형사소송은 결국 올해 9월에야 양측 모두 무혐의로 결론이 났다. 양측 모두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결정적인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씨가 훈민정음을 훔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배씨가 책을 훔쳤다는 주장이 틀린 것도 아닌 희한한 결론이 내려진 셈이다.경찰수사는 끝났지만 지난해 11월 시작된 물품인도 소송(민사소송)이 현재 진행 중이다. 12월 4일 4차 변론이 예정돼 있다.현재 1심이 진행 중인 재판은 어느 쪽이 이기더라도 양측 모두 상고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어 재판이 모두 끝나려면 앞으로 몇 년이 더 걸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훈민정음 안전’ 확인 못해

문제는 1년이 넘는 소송 과정에서 훈민정음은 사실상 실종 상태라는 점이다. 지난해 7월 방송 보도 당시 책을 감정했을 때도 훈민정음의 전체가 확인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책을 감정한 한국국학연구원 임노직(48) 연구원은 책의 3분의 2만을 봤고, 경북대 문헌학과 남권희(53) 교수는 직접 보지 못하고 방송사에서 촬영한 화면을 통해 감정했다. 남권희 교수는 “화면으로만 봤지만 3분의 2 이상을 봤기 때문에 판단하는 데는 무리가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결국 현재 책을 소장하고 있는 배익기씨를 제외하곤 훈민정음을 온전히 다 본 사람은 한 명도 없는 것이다. 배씨가 절도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을 때도, 민·형사 소송 중에도 훈민정음은 등장하지 않았다. 단지 낱장으로 몇 장만 볼 수 있었을 뿐이다.
상주경찰서 김선희 수사과장은 도둑맞았다는 물건의 존재 여부 자체가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수사가 가능하냐는 질문에 “절도죄로 고소당한 배익기씨에게 책을 가져오라고 했지만 계속 거부했다”며 “하지만 낱장으로나마 공개했고, 책을 가지고 있다고 강하게 주장해 그대로 수사를 진행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황상 절도일지 모른다는 의심은 있었지만 고소인 조용훈씨의 진술이 일관되지 않았던 데다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압수수색도 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이후 진행된 검찰 조사와 재판에서도 훈민정음은 낱장으로만 등장했다.조용훈씨 측에서 처분금지 가처분 신청을 해 법원에서 배익기씨 집을 수색하기도 했지만 역시 책은 찾지 못했다. 하지만 재판은 훈민정음 없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답답해도 우리가 할 일은 없다”는 문광부

문화체육관광부 국어민족문화과 노일식 과장은 “현행법상 개인이 소유한 문화재에 대해 국가가 관여할 수 없다”면서 “소유권이 명확한 문화재가 그러한데 상주에서 발견된 훈민정음의 경우 소유권을 두고 소송 중이라 일단은 재판이 끝나야 뭔가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재판을 기다리는 사이 훈민정음이 훼손되면 어떡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지금은 정부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기 때문에 답답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팀 강형태(55) 팀장은 “고서적은 온도나 습도에 매우 민감하기 때문에 하루 빨리 과학적인 보존처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7월 방송 보도 당시 책을 감정했던 남권희 교수는 “처음에는 설마설마 했는데 직접 가서 확인해 보니 세종 당시 간행된 것이 확실해 놀랐었다”며 “하루 빨리 공개돼 본격적으로 연구할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역시 책을 감정한 임노직 연구원도 “오히려 책의 상태는 간송에 있는 것보다 더 좋았다”며 “특히 책 윗부분에 짧은 메모가 있어 국어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라며 답답해했다.

상주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한 소식을 전해들은 재불 서지학자 박병선(82) 박사는 “안타깝다”는 말로 심정을 표현했다. 1955년 홀로 프랑스로 건너간 박병선 박사는 67년부터 13년간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과 ‘외규장각도서’ 297권을 찾아낸 주인공이다. 그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까지 지정된 문화재와 동일한 책이 이렇게 취급되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무리 가치 있는 문화재라도 개인 소유물을 국가가 함부로 할 수 없다는 점은 프랑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박씨는 “만약 프랑스에서 이런 문제가 생겼다면 일단 어떻게든 훼손만은 막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 했을 것”이라며 “한국 정부는 법 운운하며 마냥 기다리고만 있는데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다”고 아쉬워했다.


훈민정음

조선 세종 28년(1446년) 반포한 한글(훈민정음)에 대한 해설서. 책 이름을 글자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지어 ‘훈민정음’이라고도 하고, ‘훈민정음 해례본’이라고도 한다.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제작한 것으로 한글의 제작원리, 사용법 등을 설명하고 있다. 총 33장, 한 권. 목판으로 인쇄됐기 때문에 어딘가에 또 다른 판본이 있을 것으로 관측해 왔다. 그러다 이번에 상주에서 발견된 것이다. 첫 발견된 훈민정음은 40년 안동에서 발견돼 국보 70호로 지정됐으며 간송미술관에서 소장 중이다. 97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임현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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