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퇴계의 양생술, 구당의 침뜸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조선조 퇴계는 근엄한 도학자의 이미지와 달리 풍류·낭만도 은근했다. ‘낮 퇴계 밤 퇴계’라는 운치 있는 표현도 있지만, 단양군수 시절 관기(官妓) 두향과 얽힌 스토리도 그런 측면을 잘 보여준다. 부인과 사별했던 당시 둘 사이 정은 각별했다. 어느 정도였을까. 임기 마치고 떠날 때 그녀 치마폭에 써준 글 ‘사별은 소리 없지만, 생이별은 더욱 슬프다’(死別己呑聲 生別常惻測)에서 가늠할 뿐이다. 퇴계가 대신 정표로 받아둔 게 분재 매화 한 그루인데, 두향의 분신인양 애지중지했다. 오죽하면 임종 직전에 “매화에 물 잘 주라”고 당부했을까.

그의 대중적 저술로 『활인심방(活人心方)』이 유명하다. ‘사람 살리는 노하우’란 뜻의 책은 도가의 양생술(체조·호흡법)모음집인데, 선비 사이에 비전돼온 고대 이래의 비방(秘方)이다. 직접 쓴 묘비명대로 자신이 허약체질이었기 때문에 몸 다스기에 더욱 열중했고, 책까지 펴냈다. 학문·풍류를 함께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그 책 국역본이 여럿 있지만, 대중화한 것은 뜻밖에도 북한 쪽이다. 그걸 얇은 책자로 만들어 보급한다는 소식을 최근 듣고 무릎을 쳤다. 무너진 의료체계 보완책이겠지만,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다.

퇴계와 북한을 떠올린 것은 이상호의 신간 『구당 김남수, 침뜸과의 대화』때문이다. 예전 TV로 본 구당은 뜸을 놓는 행위가 의료법상 불법이네 뭐네 하면서 한의사들과 분쟁 중이라던데, 이후 소식이 책에 소상하다. 현재 그는 미국 체류 중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머슴살이에 따돌림까지 당하는 구당을 의학의 본가에서 모시겠다며 가마를 보내온 것”(17쪽)인데, 미국의사들이 침뜸 클리닉을 열어주고, 그를 중심으로 한 동서의학 통합의대도 설립 중이란다. 말대로 잘 될지는 모르겠으나 개연성은 충분하며, 가능성도 높다.

일단 ‘침뜸=저비용고효율의 대체의학’임을 미국이 파악했다는 게 중요하다. 더구나 미국 의료시장은 엉망이다. 보험혜택 받지 못하는 인구가 4600만이니 한국의 의료보험체계를 부러워할 판이다. 그런 형편에서 북한이 양생술을 재발견했듯이 미국은 동양 침뜸에 구애(求愛)를 한다. 때문에 저자는 책에서 ‘침뜸의학의 정치·경제적 의미’까지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만, 94세 구당의 목소리도 소소한 이해관계를 떠나 국민건강의 차원에서 새겨봄 직하다.

“미국으로 떠나는 마당에 다 이야기해야겠다. 위로는 역대 대통령부터 삼성·롯데·금호·대한항공 재벌가 중 내 손을 안 거친 사람이 없다. 역대 국회의장·헌재소장·감사원장·정치인 1000여 명을 치료했다. 이렇게 좋은 걸 국민들이 두루 접하도록 법을 제발 풀어달라고 그렇게 얘기해도….”(319쪽)

이 분야의 깊이 있는 책으로 『새로운 의학, 새로운 삶』(전세일 등 지음, 창비)이 으뜸인데, 책에 따르면 동서를 통합하는 대체의학·전일의학(holistic medicine)연구는 서구가 먼저다. 세균학·해부학에서 시작했던 근대의학의 태생적 한계를 알고, 티베트·중국·일본의학에 기대어 제3의 통합을 이루려는 큰 그림이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침뜸에 관심 가진 것도 오래 전인 1970년대다. 세상이 이런데도 우리네 형편은 다르다. 우군의 손발을 꽁꽁 묶어둔 채 국민건강을 독점하는데 여념 없는 한국적 의료현실이 울울적적하다.

조우석 문화평론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