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길 북적 옛명성 찾아] 낙지골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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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8면

'낙지 한 점에 입안이 얼얼하고 꼬 끝에는 땀방울이 송송 맺힌다.

화끈해진 입안을 시원하게 달래주는 조개탕, 그리고 여기에 곁들이는 소주 한 잔은 목젓을 타고 술술 넘어가며 세상사 시름을 잊게 한다.'

서울 종로구 서린동 일대에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무교동 낙지' 가 옛 영화를 꿈꾸며 '그 자리' 로 다시 몰려오고 있다.

이곳 본바닥에서 27년간 영업을 하다가 7년여동안 손을 놓았던 朴무순(83)할머니가 지난달 초 종로구청 앞에 '낙지센터' 란 새 간판을 걸고 영업을 재개했다.

朴할머니는 1960년대 중반 '대성집' '전주집' '미정집' 등과 어깨를 견주던 '무교동 낙지집 1세대' . 다른 집들은 대물림없이 무교동에서 사라졌지만 朴할머니는 둘째아들에게 가업(家業)을 전수하며 옛 맛을 되살리려는 것이다.

낙지볶음.조개탕.파전.감자탕 4가지 메뉴를 예전의 그 손맛으로 만들어 낸다.

낙지센터에 이어 이달 초에는 우정낙지집 옆에 대형주차장까지 갖춘 대규모 낙지전문점 '유림낙지' 가 개업했다.

좌석도 이 주변의 다른 낙지집보다 훨씬 많은 2백여석이나 된다.

특히 이 집은 기존 낙지메뉴 외에 점심 손님을 겨냥해 낙지비빕밥(6천원)을 내놓고 있다.

이렇게 1980년대 이후 도심 재개발에 밀려 두세곳만 남기고 자취를 감췄던 무교동 낙지집들이 어느새 10여곳으로 늘어났다.

덩달아 예전에 이곳의 맛을 즐겼던 중장년층과 무교동의 '진짜 맛' 을 맛보려는 신세대까지 몰려들어 무교동 낙지골목이 지난 날의 명성에 못지 않게 화끈하게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17일 퇴근시간이 지나면서 낙지집마다 회사원 등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들어서더니 오후 9시가 넘어서는 거의 모든 집이 손님들로 가득찼다.

17일 늦은 밤 한 낙지집에서 나오던 김상철(49)씨는 "회사가 강남에 있어 자주 오지 못했는데 오늘 와서보니 대학시절보다 더 많은 낙지집들이 번창하고 있는 것같다" 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과거에는 낙지의 양도 적고 종업원도 불친절했었는데 서로 경쟁이 심해서인지 양도 많아지고 서비스도 좋아졌다" 고 덧붙였다.

실제로 예전에 두사람이 먹으면 적당할 낙지볶음 한접시(보통 1만2천원)가 요즘은 세 사람이 나눠 먹어도 될 정도로 늘었다.

리뉴얼하는 식당이 생길 정도로 내부분위기도 지저분함을 벗어버리고 깔끔하게 변신중이다.

또 인색하던 콩나물 인심도 상당히 넉넉해졌다.

30년 가까이 '영보낙지' 간판을 이어온 김배순(56.여)사장은 "무교동 낙지집이 속속 들어서면서 낙지를 찾는 사람들도 부쩍 늘었다" 며 "그동안 '무교동 낙지집' 을 지켜온 다른 식당 주인들 역시 과거의 영예를 되찾을 호기로 기대하고 있다" 고 전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업소간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예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원조다툼이 벌어지는 기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간판이나 명함에 '원조.정통' 라고 명시한 곳이 벌써 세 곳이나 등장했고 다른 몇몇 식당도 이에 가세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서린낙지' 박종훈(65)사장은 "원조를 내세우지 않아도 알만한 사람들은 어느 집이 원조인지 알고 있고, 원조가 아니더라도 이미 단골손님들은 그 집의 맛에 길들여져 있다" 며 "불필요한 소모전은 피해야 할 것" 이라고 말했다.

무교동 낙지집은 60년대초 청계천을 복개한 뒤로 서린동 일대 주택가 좁은 골목을 따라 들어섰으나 인접 무교동의 명성이 워낙 높아 '무교동 낙지집' 으로 불리게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매운 맛이 다소 순해지고 젊은이들을 겨냥한 신종메뉴도 등장했지만 여전히 쫄깃한 낙지와 고추의 매운 맛은 콧등의 땀을 훔치게 하는 서민음식으로 자리잡게 하고 있다.

유지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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