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취재, 이라크보다 더 위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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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내년 5월 지방선거와 관련된 취재를 하던 기자 27명이 괴한들의 테러에 의해 한꺼번에 살해된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섬 지역은 전 세계적으로도 언론인에게 가장 위험한 곳으로 꼽힌다. 이들 기자는 지역 정치인과 가족 등 다른 30명과 함께 23일 민다나오섬 마구인다나오주에서 납치돼 목숨을 잃었다.

“내년 선거까지 정치적 갈등이 계속 이어질 것으로 보이며 이에 따라 더 많은 언론인 희생자가 나올 겁니다.”

‘언론 자유와 책임을 위한 연구센터’의 루이스 테오도르(60) 부대표(전 필리핀대 언론학과 학과장)는 최근 필리핀에서 일어난 집단 정치테러와 관련해 25일 본지와 전화통화에서 이같이 밝혔다. 테오도르 부대표는 “필리핀에서는 1986년부터 106명의 언론인이 정치인과 연관된 세력에 의해 살해당했다”며 “특히 민다나오섬에서는 이들 중 59%에 해당하는 62명이 희생됐다”고 밝혔다.

이번 학살이 발생한 민다나오섬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반군들이 활개치고 있는 지역이다. 알카에다와 연계된 아부사야프와 이슬람 반군 ‘모로국가해방전선’ 등이 지방 유지들과 연결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곳이다.

테오도르는 “지방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중앙정부의 무능함 때문에 언론인 테러가 자주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방 유지들이 무기를 갖춘 사병을 거느려 중앙정부가 손을 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언론인 테러에 대한 글로리야 아로요 정권의 무관심한 태도도 희생자가 늘고 있는 요인 중 하나다. 테오도르는 “86년 이후 발생한 전체 언론인 희생자 중 절반 이상이 2001년 아로요 대통령 취임 이후 살해됐다”고 비판했다. 그는 “대통령의 남편인 마이크 아로요가 46명의 언론인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걸어 일부 유죄를 이끈 바 있다”며 “현 정권은 언론에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시한다”고 밝혔다.

외신들과 국제기구들도 필리핀의 언론인 테러를 비판했다. CNN은 ‘언론인의 위협’이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을 통해 “필리핀은 언론인에게 가장 위험한 국가”라고 26일 보도했다. 밥 디에츠 언론인보호위원회(CPJ)의 아시아 담당관은 “이 사건은 필리핀이 이라크보다 언론인에게 더 위험한 국가임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평가했다.

한편 AP통신은 필리핀 당국이 이번 정치테러 용의자의 신병을 확보 했다고 26일 보도했다. 통신은 필리핀 검찰의 말을 인용해 “마구인다나오주 다투 언세이 시장인 안달 암파투안 2세를 가족들로부터 인계 받아 수사를 벌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암파투안 2세는 이번 사건과 무관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피해자 가족들은 “마구인다나오 주지사인 아버지 암파투안이 아들에게 주지사 자리를 넘겨주기 위해 준비해 왔다”며 “이들 부자가 정치적 라이벌에게 테러를 자행했다”고 주장했다. 앞서 필리핀 정부는 무장 세력으로 치안이 불안해진 남부 지방에 24일 1000여 명의 정부군을 파견했다.

김민상·이승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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