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꽃보다 뿌리에 물주는 아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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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파리에는 한겨울에도 시들지 않은 잔디가 파랗고 간혹 개나리가 노란 꽃다발을 들고 서있다. 카르티에 재단 미술관의 유리벽 저 너머에는 벚꽃이 꿈속처럼 한두송이씩 터지고 있다.

한국 국제교류재단과 프랑스 국제관계연구소가 주관한 제4차 한.프랑스 포럼에 다녀왔다. 양국간의 중요 현안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고 그 결과를 정부 및 주요 관련기관에 전달함으로써 새로운 세기의 협력관계를 모색하자는 만남이다.

두 나라에서 경제.언론.학술.사회.문화계를 대표해 주로 여론주도층 인사들이 참여하는 이 상설회의체는 사실 구체적인 성과 못지 않게 관계인사 상호간 인적접촉이 중요하다.

토론의 내용은 여러 분야에 걸친 것이지만, 그러므로 그 모든 문제의 밑바탕에 깔린 기본적 핵심은 역시 광범위한 의미에서의 '문화' 다. 서로의 문화에 대한 진정한 이해야말로 정치.경제적 협력에 넓이와 깊이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흔히 문화의 세기라고 한다. 말은 그렇게 한다. 그러나 흔히 정치.경제를 토론하는 자리에서 문화란 차마 모른체 할 수 없어서 초대한 가난한 친척이나 '장식' 이 되기 쉽다.

그러나 문화는 가난한 친척이 아니다. 문화는 삶에 존재이유를 부여한다.

근래에 와서 우리 사회에는 경제와 문화를 결합시키는 발상이 널리 퍼져가고 있다. 예술집약산업이나 문화부가가치의 창출이 그러한 관심의 범주에 속한다. 그같은 발상의 출발점에는 가령 미국의 스필버그가 영화 한편을 만들어 얻는 수익이 한국의 자동차 산업의 그것과 맞먹는다는 식의 뒤늦은 발견이 주는 충격이 잠재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대학의 연극영화과에 인재들이 쇄도한다. 물론 문화에 투자해 많은 이윤을 남긴다면 경제를 위해서도, 문화를 위해서도 좋은 일이다.

그러나 문화와 경제가 내적.유기적으로 결합돼야 진정한 삶의 질이 보장된다는 확신을 갖지 못한 채 오직 경제원칙에 종속된 문화적 관심에는 위험한 일면이 있다.

이런 왜곡된 문화적 관심은 성급한 계산을 동반한다. 문화와 예술은 기발한 아이디어의 생산만이 아니다. 창조적 정신의 힘은 삶의 밑바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므로 삶 그 자체처럼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문화는 인내의 산물이요, 그 가치에 대한 확신의 산물이다. 성급히 결실을 거두려는 '투자' 로 문화의 창의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다. 꽃부터 미리 따거나 꽃에 물을 줄 것이 아니라 뿌리에 거름과 물을 주어야 한다.

한.프랑스 포럼의 한 프랑스측 참가자는 한국을 격상시킨 대사는 외교관.정치가가 아니라 백남준이라고 말했다. 우리 언론은 최근 미국의 구겐하임 미술관이 기획한 백남준 회고전 소식을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바로 그 언론은 지난날 무대 위에서 줄이 끊긴 바이얼린을 개처럼 끌고 다니고 피아노를 부수는 백남준의 '기행' 을 문화면이 아닌 '해외토픽' 난에 보도하며 비웃었던 스스로를 기억하는지 모르겠다.

카뮈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준 반항적인 신 프로메테우스가 오늘의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오늘날의 인류는 오로지 기술만을 필요로 하고 오로지 기술에만 관심을 갖는다.

반대로 프로메테우스는 기술과 예술을 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않는다. 그는 육체와 영혼을 동시에 해방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의 인간은 정신이 잠정적으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우선 육체부터 해방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정신이 과연 잠정적으로 죽은 채 기다릴 수 있는 것일까?" 지금부터 2년 전 김대중 대통령은 선거에서 승리한 새벽, 자택의 대문앞에 나서서 "이제부터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는 함께 가야 한다" 고 선언한 바 있다.

이 말 속에서 특히 주목할만한 대목은 다름아닌 '함께' 다. 이제 우리는 빵과 자유를 동시에 얻어야 한다는 선언에 프로메테우스의 교훈을 추가하지 않으면 안된다. 문화는 경제원리.시장원리에 종속된 부차적 사안이 아니다. 빵과 자유와 아름다움은 '함께' 가야 한다.

김화영<고려대 교수.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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