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출근 못하는 '낙하산 행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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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민은행 사태가 갈수록 가관이다. 갖은 해프닝과 추태를 거듭하더니 결국 파행 국면으로 치닫고 있다. 정부는 무리수를 동원해 김상훈(金尙勳)금융감독원 부원장을 행장 후보로 추천했고, 이에 반발한 노조가 주주총회장을 봉쇄하자 사외이사 등은 장소를 옮겨 밤중에 기습적으로 金후보를 행장으로 선임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노조가 출근을 저지하는 바람에 행장 등이 사무실에도 못 들어가고 있는 모습이 마치 난장판 국회를 방불케 한다. 분위기가 이러니 당장 영업인들 제대로 될 리가 없고, 후유증도 만만찮을 것 같다.

또 이번 일로 인해 국내 금융계, 그리고 한국 경제는 신뢰성에 얼마나 타격을 받을까. 우리는 이런 파행의 책임은 근본적으로 정부측에 있다고 본다. 물론 만족스럽게 경영 개혁을 못한 국민은행 경영진에도 책임은 있다. 또 수백명이 나서서 힘으로 주총장을 봉쇄하고 행장.임원의 출근을 저지하는 노조측 태도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파행은 처음부터 예상된 일이었고, 때문에 사태를 이렇게까지 악화시킨 1차적 책임은 분명히 정부측에 있다는 얘기다. 우선 과정이 투명하지 못했다. 최근 행장 등이 잇따라 옷을 벗고 있다.

겉으론 '일신상' '건강상' 이유지만 속사정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송달호(宋達鎬)전 국민은행장도 '건강상' 이유로 중도퇴임 의사를 밝히자 바로 '다음 행장은 누구…' 란 소문이 파다했고, 이는 현실로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경영자선정위원회' 란 조직이 급조됐고, 금감위 대변인이 나서기도 했다.

정부의 원칙과 기준이 무엇인지도 궁금하다. 국민은행은 그래도 우량은행 중 하나로 꼽힌다. 골드먼 삭스 등 외국인 투자자가 대주주인 시중은행이다. 그런데 갑자기 정부 인사를 행장으로 내려보내니, 그 배경을 무슨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이런 기준이라면 앞으로 국민은행보다 실적이 못한 다른 은행도 모두 행장을 정부 인사로 갈겠다는 이야기인가.

정부 당국자들은 입버릇처럼 '관치(官治)금융은 옛말' 이라고 강조한다. 또 금융 구조조정을 거론할 때는 예외없이 '자율적' 이란 말이 붙는다. 하지만 실제 상황은 정 반대다. 공적자금을 무기로 각 부문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다.

인사도 마찬가지다. 달라진 것은 적법(適法)을 가장한 절차이고, 빠져나갈 논리만 교묘해졌을 뿐이다.

물론 은행 부실이 환란의 주 요인이었던 점을 감안할 때 부실을 막기 위한 정부의 관리.감독은 당연하다. 하지만 모든 것이 일관된 원칙과 공정하고도 투명한 절차에 따라야 한다.

사심(私心)을 보이지 않는 것은 더 중요하다. 심지어 은행 경영까지 정부가 맡아야겠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오만이자 괴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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