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보살인가 건달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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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 사람들의 관심은 온통 국회의원 선거에 쏠려 있다. 출마자들은 지역감정.상대비방.흑색선전.금권.관권 및 역관권 등을 이용해 표를 얻으려고 한다. 너도나도 덩달아 법석을 떨어서, 선거 외에는 중요한 일이 없는 것처럼 착각될 정도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어떤 주제를 갖고 토론을 해보면 각기 그럴듯한 의견들을 제시한다. 그런데 아무리 대화가 길어도 많은 경우에 마지막에 이르는 결론은 주최자들이 처음에 의도했던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저 선거도 비슷하게 끝날 것이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지연.학연.직장연 등을 생각하면서 후보를 고를 것이다. 저 바람 앞에 아무리 훌륭한 인물도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역감정이나 설렁탕 한그릇에 흔들리지 말고 양심적이고 유능하고 참신한 인물에게 표를 주라는 원론적인 말은 무의미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나는 총선 출마자들 쪽으로 관심을 돌리려고 한다.

나는 며칠 전에 절집의 한 선거에 후보로 참여했었다. 종교단체에 무슨 선거냐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불교가 획일주의가 아닌 다방편(多方便)주의를 표방하기 때문에 일정한 직무자는 선거절차를 통해서 뽑는다. 나를 지원해주십사 하는 부탁과 인사를 받은 한 고승은 갑자기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보살인가 건달인가. " 그 고승에 의하면 공직은 봉사직이다. 남을 위해 자신의 신명을 바쳐야 한다. 만약 출마자가 자기를 버려서 남을 위할 각오가 돼 있다면, 또 지혜롭고 유능하게 자신을 희생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히 보살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오직 권력과 명예를 누리기 위해서 출마한다면 그는 사기꾼.건달이다. 그래서 고승은 내가 보살과 건달 어느 쪽에 속하는지를 물은 것이다.

나는 평소에 존경하던 선배 어른을 상대 후보로 삼아 상대는 부족하고 내가 유능하다고 외치면서 누차 회의에 빠졌다. 불교에서 모른다고 하는 사람은 참으로 아는 사람이다. 자신이 잘났다고 하는 사람은 뻔뻔스럽고 못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자랑을 해야만 했다. 불교적으로 보면 나는 내가 못났다고 널리 광고하면서 다닌 셈이다. 나는 정말 염치없는 사람이다. 저 고승의 기준에 의하면 나는 사기꾼.건달이다.

이번 총선에 출마한 후보들은 어떨까. 저들도 상대에게 양보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참, 한 미담도 있었다. 지역구가 통합되자 후배가 선배 후보에게 자진해서 양보하고 불출마를 선언한 일이 있었다.

그가 속한 당은 그 큰마음을 알아보고 오히려 양보자를 공천했었다. 그러나 저 후보조차도 다른 당 후보에게는 국회의원직을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천여명의 다른 후보들처럼 자기가 더 유능하다고 동네방네 다니면서 선전할 것이다. 저 후보들에게 고승의 질문을 들이대보자. "그대는 보살인가 건달인가" 라는 물음에 뭐라고 대답할까.

역사를 움직이고 후세에 이름을 떨친 인물들이 훌륭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그들이 남을 위해서 자신을 버린 보살행위를 했다는 데는 이의가 없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꼭 그들만 훌륭한가.

저 역사의 승자들에게 자의 또는 타의로 양보하거나 패해서 평민으로 살다 소리없이 사라진 사람들 가운데에도 보살이 많지 않을까. 무대나 자리를 양보한 이들이 더 훌륭한 보살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오는 4월 13일 승자에게만 관심을 갖는다면 우리는 꼼짝없이 저 후보들의 들러리로 전락하고 만다. 누가 건달이고 누가 보살이냐를 생각할 때 후보로 나서지 않은 나와 마음씨 좋은 이웃도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할 수 있다.

역사는 이긴 자의 편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밤하늘을 보며 별빛은 승자이고 어둠은 패자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산의 봉우리는 승자이고 계곡은 패자라고 말할 수가 있을까. 보살과 건달을 가리는 마당에 무슨 승패가 있겠는가.

스스로 보살이 될 자신이 없으면, 후보 가운데 보살이 없으면, 조금이라도 보살에 가까운 이에게 표를 주는 원칙이라도 세워보자.

석지명 <법주사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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