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 기업에 손 벌리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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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4.13 총선이 36일 앞으로 다가왔다. 걱정대로 아니나 다를까 선거 분위기가 과거 어느 선거 때보다 혼탁하다. 흐리다 못해 악취가 날 지경이다.

본격적인 선거운동이 시작되기도 전에 지역감정을 부채질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다. 불법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고, 직업 선거꾼들은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치고 있다. 후보자들을 상대로 탈법을 부추기는 행위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선거 브로커들이 설치는 데는 출마자들의 책임이 크다. '더러운 손' 이라도 빌려 가슴에 금배지를 달면 그만이라는 알량한 태도와 도덕적 불감증이 이들의 발호를 조장하는 원인이다.

돈선거가 될 조짐도 나타나고 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6대 총선의 후보당 국고지원 선거비용이 최저 7천만원에서 최고 1억6천만원으로 평균 1억2천만원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15대 때보다 50% 가량 늘어난 수치다. 그런데도 시중에는 '20당 10락' 이라는 이야기가 공공연하게 나돌고 있다. 선거운동비로 20억원을 써야 의사당에 진출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럴 경우 한 선거구에서 여야를 합해 50억원 정도의 선거자금이 뿌려질 것으로 추산된다. 법정 선거비용보다 실제로는 20배가 더 살포되는 셈이다. 표로 선출된다기보다는 국회의원 자리를 돈으로 산다는 말이 더 적합하다 하겠다.

의원 지망자들이 엄청난 선거비를 어떻게 충당하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혈연과 지연, 학연을 통해 받는 후원금이나 중앙당에서 내려보내는 지원금이 주된 자금줄일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자신이 재력가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재선 이상 상당수 국회의원의 재산변동 신고 내역을 보면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선거전이나 후나 재산변동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결국 자기 호주머니는 건드리지 않고 남의 돈으로 선거를 공짜로 치렀다고 해석할 수밖에 다른 방도가 없다.

몇년 전 수도권지역에서 여당의 지구당위원장을 지낸 한 인사의 경험담을 들었다. 뚜렷한 직업 없이 지구당위원장만 맡았는데도 지구당을 관리하고 가정을 꾸려나가는 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기업체를 경영하는 부위원장들이 살림을 도맡았다는 것이다. 평상시도 이러하건대 선거철에 기업주로부터 갖은 지원을 받는다는 것은 정치인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일일는지도 모른다.

과거 선거 때면 여당후보들이 특정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 수수는 물론 유세 때 직원들을 청중으로 보내달라거나 입당원서를 받는 사례를 흔히 봐왔다. 선거를 빙자해 기업체에 손을 벌리는 정치권의 행태는 그 기업에 경제적 손실을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결과적으로 국가 경쟁력을 약화시킨다.

얼마전 한 대기업의 회장은 비슷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기업들이 생산활동과 무관한 사회적 비용을 너무 과중하게 부담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방위성금과 수재의연금.체육성금 등 수많은 이름의 기부금은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비용을 증가시킨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는 결국 우리 기업의 경쟁력을 취약하게 만드는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았지만 사회적 비용에는 정치.선거자금도 포함돼 있다고 짐작된다.

최근 들려오는 소문은 기업체의 경제력이나 인력을 선거판에 끌어들이려는 시도로 보여 걱정된다. 정치권 일각에서 벤처를 키워놨는데 도움이 안된다고 투덜거리고 있다는 후문이다.

또 지난해 여름부터 정치권의 음성자금이 코스닥 등록을 앞둔 벤처에 몰렸고, 등록후 주식 매매차익은 선거에 유입될 것이라고 한다. 성공한 상당수 벤처기업들은 정치권의 혜택을 바탕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정치권이 벤처기업의 시가총액이 내로라하는 대기업보다 많다는 사실만 생각하고 정치권이 이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해서는 안된다. 자칫하면 정보화에 대한 남다른 지식과 땀과 노력으로 갓 피어나고 있는 벤처 열풍을 식힐지도 모를 일이다.

정치자금과 특혜를 주고 받는 정경유착은 '이번 선거를 계기로 '사라져야 한다.제 발이 저리지 않다면 선거돈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면 어떨지 정치권에 묻고 싶다. 대기업이든 벤처기업이든 선거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도성진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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