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산업 대출 외면하는 은행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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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이헌재 경제부총리가 "은행은 부실에 대한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해 대출을 안 하는 등 패자논리에 젖어 있으며, 외환위기증후군에 빠져 세이프 사이드(safe side) 게임만 한다"고 질타했다. 적절한 지적이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은행산업은 큰 변화를 겪었다. 은행 수도 줄고, 제일.국민 등 대형 은행들은 외국계 손에 넘어갔다. 특히 은행들은 위험 부담이 적고 수익성은 높은 소매금융에만 치중하고 있다. 은행 대출 중 산업대출의 비중은 1998년 75.9%에서 올 6월 52.7%까지 떨어진 반면 가계대출은 24.1%에서 47.3%까지 급상승했다. 그나마 안전한 곳만 찾다 보니 기업대출 중 시설자금은 20%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은행만 나무랄 수도 없다. 은행도 돈을 벌어야 한다. 특히 부실이 생기면 은행원이 책임지도록 제도가 돼 있어 돈 빌려 주는 것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기술력이나 경영능력 또는 신용은 뒷전이고 '안전한 담보'에만 매달리고 있다. 그 결과 은행은 쌓인 돈을 빌려줄 곳이 없고, 기업은 돈을 못 구해 고통받고 있는 것이다. 이런 책임 문제가 걸려 있어 정부의 독려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신규 대출은 고사하고 기존에 대출한 것도 조금만 이상하면 바로 환수에 들어간다. 한은이 금리를 내린 8월에도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대출은 6000억원이나 줄었다.

이런 현실적 제약 때문에 재정 확대나 감세, 또는 금리를 내린다고 기업의 활동이 활발해지지 않는다. 과거처럼 부실한 대기업에 뭉칫돈 나가는 일은 없어야겠지만, 지금처럼 성장 가능성과 미래가치가 있는 기업까지 돈을 못 빌려 신기술.신제품을 개발하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다.

은행과 은행원들이 합리적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명시된 '책임 기준'이 나와야 한다. 은행들도 고리대금업자란 비난을 안 받으려면 대출기법 개발에 나서야 한다. 이 부총리도 "책임을 계속 물으면 조직과 사회가 가라앉는다"고 우려했다. 문제를 알았으면 은행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놓아라.